친교실

제목 능력주의에 대하여 2022년 02월 20일
작성자 비타악티바
  2월 20일 주일 예배에서 담임목사님 설교 중 언급된 작금의  '능력주의' 세태에 대한 지적에 덧붙여, 참고할만한 글이 있어 성도님들께 공유드립니다.
  이준구 명예교수의 최근 글입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를 다시 생각해 본다>

등록일 : 2022. 2.  5. (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일약 유명해진 샌델(M. Sandel)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이 나온 직후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능력주의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둘러싸고서요.

이 책의 제목은 샌델이 능력주의에 대해 강한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폭정’(暴政, tyranny)이란 단어가 그의 부정적 시각의 정도를 잘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이와 같은 그의 문제 제기에 대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옹호하고 나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교육기관과 직장이 인종, 성별, 출신지역, 출신가문 등을 고려해 사람을 뽑는다면 과연 이것을 공정한 선발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능력(merit)에 의해서만 사람을 뽑는 것이 훨씬 더 공정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제나 음서제에 비하면 능력주의가 훨씬 더 공정한 선발기준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샌델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혈연, 학연, 지연 등에 기반한 짬짜미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 입학시키고 취직을 시키는 것만큼 공정한 시스템이 어디 있겠느냐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샌델은 능력주의를 좀 더 깊게 파들어 가면 이것의 어두운 측면이 드러나고, 능력주의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샌델이 보기에 능력주의의 가장 큰 결함은 승자들을 오만으로, 그리고 패자들을 굴욕으로 몰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능력주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승자는“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고 자만하게 됩니다.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 성공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기까지 합니다.

반면에 입시에서 떨어진 사람이나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오직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결과가 빚어졌다는 굴욕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바지만, 모든 것이 노력의 결과로 정직하게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서 운(luck)이 크게 작용하는 것을 절감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일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굴욕감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은 감사와 겸손의 자세를 갖기 힘들다는 것이 샌델의 지적입니다.
오직 자신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성공을 쟁취했다는 성취감에 도취한 사람에게서 겸손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샌델은 감사와 겸손의 마음이 없는 사람의 경우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한 배려도 없기 마련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살다 보면 주위에서 소위 ‘개천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눈물겨운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위치에 오른 사람들 말이지요.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 중 부드럽고 겸손한 사람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불통이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거만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이런 사람들이 특히 인성이 모질어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많은 덕성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능력주의에 기반한 성공의 신화에 도취해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철석같은 믿음을 갖기 때문에 겸손함을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을 거둔 배경에서 그의 헌신과 노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공이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만 일구어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수많은 운에 의해 우리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예를 들어 타고난 자질과 재능은 자신의 노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순전히 운이 좋아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사회에 태어난다면 성공을 거둘 수 없습니다.
나아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거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 역시 원천적으로 선택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어떤 사람이 거둔 성공은 일련의 행운을 겹쳐서 만난 덕분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이란 것이 실제로는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행운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프랭크(R. Frank) 교수가 쓴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Success and Luck)라는 책이 바로 이 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성공은 행운의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 말이지요.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의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에 거의 다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는 운에 의해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크게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저 피상적 관찰을 한 결과에 의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관련 연구자들이 수행한 엄밀한 과학적 분석 결과에 기초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1960년대 미국 사회학계, 심리학계를 크게 들썩거리게 한 논쟁이 바로 ‘nature vs. nurture’ 이슈입니다.
IQ 점수로 대표되는 어떤 사람의 인지적 능력(cognitive ability)이 타고난 유전적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느냐 아니면 성장기의 교육적 환경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느냐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단지 학문적 관심 때문만이 아니고 정치적 함의 때문에 더욱 가열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 입장에 선 사람은 유전적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분석결과를 반겼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취약계층 자제들의 교육적 환경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에 아무리 돈을 퍼부어 보았자 낭비에 그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당시의 논쟁 결과를 보면 두 요인이 대체로 반반씩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간에,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 모두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온 아기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지적 능력은 거의 전적으로 태어날 때의 운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자신의 선택이나 노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데는 오직 인지적 능력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집중력, 호기심, 진취성, 성취동기, 인내심, 사교성 같은 비인지적 특성(non-cognitive characteristics)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측면도 유전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성장기의 배경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최근에 언급한 바 있는 하든(K. Harden) 교수의 “The Genetic Lottery: Why DNA Matters for Social Equality”라는 책은 이 사실이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입증되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IQ는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이 80% 이상을 결정한다는 연구결과가 확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은 95% 이상, 그리고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은 85% 정도라니 비인지적 특성도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학벌이 좋은 사람을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해 우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졸업장을 손에 쥐면 일자리 얻기가 더 쉬워지고 더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는 것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구요.

태어날 때 운이 좋아 인지적 능력과 비인지적 특성상의 우위를 갖는 사람은 교육과정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고, 이는 사회에서의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든에 따르면 텍사스주에서 쌍둥이를 대상으로 수행한 분석결과 수학과 영어 시험성적의 70% 이상이 이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합니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30%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영국의 경우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1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구요.

하든은 이것을 출생 당시의 복권추첨(lottery)에 비유해 과연 어떤 복권을 뽑아들었는지가 한 사람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우연의 결과이며 본인의 노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능력주의가 매우 정의롭고 공정한 원칙 같지만, 실제로는 우연의 결과에 기초하고 있는 공허한 원칙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는 운이 경제적 성공 여부의 열쇠가 된다는 데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생존경쟁에서 갖는 엄청난 이점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압도적인 이점을 갖고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 좋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행운으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미 성공이 거의 보장된 상태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능력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운이 좋은 사람을 우대하는 데 있지는 않을 겁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노력을 미덕으로 보고 이것을 통해 성공을 이룬 데 대해 후한 보상을 하는 것이 능력주의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능력주의는 이와 같은 이상과 크게 동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운이 좋은 사람을 우대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요.

샌델이 비판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결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사람이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오만에 빠지게 만드는 동시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못나서 그런 것이라는 굴욕감을 안겨 준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못나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나빠서 그런 것인데도 말입니다.

샌델은 우리가 능력주의적 오만에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잘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는 사람이 감사와 겸손의 자세를 가질 이유가 없으며, 이와 같은 태도는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서로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질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갈라놓는 소득, 재산, 지위의 불평등이 능력이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현실의 근저에 바로 이 능력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능력주의의 함정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좀 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https://jkl123.com/board.php?table=board1&st=view&page=1&id=19335&limit=&keykind=&keyword=&bo_class=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