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세상 때 묻지 않은 내 친구 2015년 03월 07일
작성자 장혜숙

 


 

오래된 옛 친구들을 만났다. 풋풋했던 시절부터 수 십 년을 함께 늙어온 옛 친구들.

한 친구가 뜻 밖에도 남편에게 크게 화를 낸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은퇴하고 부부가 단짝이 되어 아주 재미있게 지내는 친구인데 무슨 일인지 귀를 세우고 들었다.

우연히 정기적인 부부 모임의 어떤 여자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그 여자 참 대단한 여자야." 그랬단다. 친구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물었는데 "서울 대학 나오고, 자식들 잘 가르쳐서 다 서울대학 보내고, 운동도 잘하고, 인물도 좋고, 벤츠 몰고다니고" 이렇게 말하는 남편에게 울컥 화가 났단다.

내 친구는 서울 대학은 아니지만 명문 대학 영문과 출신이고, 인물도 예쁘고, 자식들도 다 명문대 출신이니 다른 여자를 대단하다고 말한 것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 남편도 세상의 속된 것에 물들지 않은 순수하고 정의롭고 교양있고 성실한 남편이다. 위에 열거한 '대단한 여자'의 조건들을 정말 대단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남자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 별 생각없이 가볍게 말했을 뿐일 것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나서 남편에게 마구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고 한다.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그런 것이야? 서울대학? 골프? 벤츠?...???" 남편은 갑자기 몰아부치는 데 당황하여 그런 게 아니라고 수습하느라 쩔쩔맸지만 내 친구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내 친구도 자기 남편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안다. 평생을 몰상식이나 무개념으로 살아오지 않은 것 잘 안다. 그런데 남편의 말에서 '대단한 여자'의 기준이 세속적인 항목들인 것에 갑자기 화가 나고 흥분하여 남편을 속물 취급하며 마구 몰아 부쳤던 것이다.

화가 난 내 친구는 우리 친구들 몇몇의 이름을 대가면서 이런 여자가 대단한 거지, 서울대 안 나왔어도 지금 제 할 일 똑부러지게 잘하고 있는 ㅇㅇㅇ, 독한 시어머니 시집살이 견디고 잘 살아온 ㅇㅇㅇ, 은퇴한 후 오로지 봉사활동에 열심인 ㅇㅇㅇ.... 이런 식으로 우리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남편에게 마구 쏘아댔다고 한다. 쑥스럽게도 내 이름까지 거론됐다.

내가 물었다. "애야, 너 정말 내가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하니? 그냥 남편에게 대드느라고 한 소리 아니야?" 친구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 대단하지!"(나에 대한 말이니 그 내용은 쓰지 않겠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내 친구는 자기 남편이 세속적인 것에 물들까봐 경계하고 싸우기까지 하는데, 나는 남편에게 남들 사는 것처럼 좀 편히 살게 해달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친구가 내게 조목조목 열거하며 이런 네가 대단한 여자라고 했는데, 나는 그 삶이 때로는 버겁고 가끔은 벗어날 기회를 꿈꾼다.

봄은 왔는데 봄빛은 아직 보이지 않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괜한 눈물이 났다. 나는 세상 속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내 친구, 올곧게 살아온 내 친구, 옳고 바른 생각으로 험한 세상으로부터 남편을 잘 지켜내고 있는 지혜로운 내 친구, 별 것도 아닌 나 같은 여자를 대단하다고 여겨주는 너그러운 내 친구, 친구야, 네가 내 속을 다 알게되면 너 나한테 싸우자고 덤빌 것이다. 나는 네가 대들까 봐 무서워서 네가 나를 보는 생각에 어긋나지 않도록 잘 살게. 그리고, 혹시 내 남편이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들어서(?) 나 편하게 살게 해주려고 잘못된 생각하게 되면,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경우가 온다면 내가 그 사람 정신 번쩍 들도록 무섭게 혼내줄께.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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