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9 2017년 04월 17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9)


잘들 지내고 계신지요? 느긋한 평화를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제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게 참 힘겨운 나날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노아 시대의 인류를 바라보며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다. 인간이 전락한다 해도 차마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6:5-6). 온통 무법천지로 변한 세상, 속속들이 썩은 세상을 보고 후회하고 마음 아파 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또한 저려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바로 이런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인간의 죄성이나 원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비관론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덧거친 세상에 오래 머물다 보니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선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도저히 받아들이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거리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는(시144:14) 세상의 꿈은 우리에게서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고, 미움과 증오를 조금의 유보도 없이 드러내는 이들이 거리를 활보할 때, 세상은 혼돈으로 변하고 맙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혁명적 무질서가 아니라, 옛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반동적 무질서가 폭력적으로 거리를 휩쓸고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홍수를 보내실 때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창7:11-12). 이것은 정확하게 창조의 둘째 날 일어났던 창조 과정을 뒤집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 한 가운데 창공이 생기게 하심으로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으셨습니다. 도도하게 밀려와 사람들과 그들의 가산을 삼키는 두려운 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물에 질서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혼돈의 물은 '하늘 위에 있는 물'과 '땅 아래 있는 물'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노아 시대에 그 두 물이 다시 합쳐졌습니다. 혼돈으로의 완벽한 회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시지만 인간은 혼돈을 창조합니다. 


혼돈과 무질서가 한 사회를 삼키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혼돈과 무질서의 원인을 찾아 제거함으로 자칫하면 자기들을 삼킬 수도 있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때 선택되는 이들은 대개 그 사회의 약자들 혹은 국외자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지킬 힘이 없던 사람들,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 평소에 불온시 되었던 이들은 언제라도 사악한 권력자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혼돈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모순을 자기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아사셀 염소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아사셀은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짊어지고 빈들로 내보내지는 숫염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선택된 숫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반역 행위와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 후 빈 들로 내보냅니다. 일종의 상징행위이겠습니다만 누군가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은 인간의 유구한 습성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혼돈의 물이 넘실거리면서 우리 생존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 숨은 가지런하지 못하고, 불안의 어둔 그늘이 우리 영혼을 스산하게 만듭니다.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놓이고,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우리 영혼이 편안해지는 장소에 가고 싶습니다. 시인 정진규 선생은 4월이 되어 왈큰왈큰 알몸을 열어 보이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봄 신명에 지펴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몸 詩.14' 중에서)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짜릿해집니다. 시인은 적대감정이나 두려움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의 실존을 '잘 열리고 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열리고 있기에 그는 누구라도 와서 자기의 손님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얼굴에 '접근 금지'의 팻말을 써붙이고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살면서 지쳤기에 이런 초대가 고맙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열린 손'이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모색하며 살았던 그가 거의 인생의 말년에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 합니다. 형태는 아주 단순합니다. 활짝 편 손바닥 형상입니다. 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 작품을 소개한 큐레이터가 인용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인생의 어느 지점이 돼서야,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무장 해제할 수 있는 걸까?" "누구든 다가올 수 있게 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열어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타자들에게 닫히는 세상에 대한 절규였을까요? 큐레이터는 열려 있는 큰 손, 바로 그게 코르뷔지에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지금 우리 앞에 현전하여 있는 대상들을 보고, 만지고, 인식하고,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안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도 가끔 미술관에서 사온 '열린 손' 포스터를 들여다 봅니다. 볼 때마다 내 손도 그렇게 열리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환대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과 만나면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작년 말에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열렸던 떼제의 유럽 젊은이 모임에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던 그 나라 사람들은 낯선 이들과의 접촉을 좀 꺼려왔다고 합니다. 대회 참가자들이 대략 1만 5천 명이 넘었다는데, 모임을 준비한 분들은 그 모든 참가자들이 홈스테이를 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시 관리들은 그 계획은 무모할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할 거라면서 체육관이나 기타 공공시설을 빌려주겠다고 역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환대'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떼제 공동체의 실무자들은 거의 발로 뛰다시피 하여 지역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그 낯선 이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낯선 손님들을 맞아들인 이들은 숙소를 제공한 것은 물론이고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 주었다고 합니다. 매우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위해 자기 집을 연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낯섦은 더 커지라는 초대입니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줍니다. 리가에서 일어난 기적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난민이 되어 떠돌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럽 전체가 그런 난민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난민 신청을 한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천덕꾸러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조차 꾸기 어렵습니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햇곡식을 거두면 그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성소에 가져갔습니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바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조상들의 신산스러웠던 삶을 상기합니다. 그 첫 문장은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신26:5)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잊지 않으려고 전례 의식문 속에 그런 고백을 담았던 것입니다. 


성서의 인물들 가운데는 나그네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였습니다.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은 헤브론 원주민들에게 아내를 매장할 땅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창23:4) 하고 말합니다. 애굽 땅에서 바로와 만난 야곱도 나이를 묻는 질문에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창47:9)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했습니다. 그 뜻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은 제국의 질서 속에서 자기 권리를 누리지 못하던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탈출 공동체를 향해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22:21)고 말씀하셨습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법전에 이르면 나그네는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신10:19). 욥은 "나는 나그네가 길거리에서 잠자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으며, 길손에게 내 집 문을 기꺼이 열어주지 않은 적도 없다"(욥31:32)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나그네였습니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공생애 기간 동안도 정착생활의 달콤함을 누리지 못한 채 늘 길 위에서 사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근원적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처럼 서러운 것이 또 있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들은 가히 하나님의 일꾼이라 할 만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엠마우스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가 처음에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맞아들였을 때 예배당이 비좁아 그들을 다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피에르 신부는 조금 고심하다가 마리아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아마 그분도 기뻐하실 거라면서 말입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떼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주시는 가장 고통받는 타자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말미에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남하했던 유대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고, 전쟁이 끝나자 포로로 억류된 독일 군인들을 돌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을 품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난민들을 맞아들여 주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모든 난민들을 다 품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 작고 소박한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혁의 누룩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에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김현경 선생님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일에 익숙한 이 세대 사람들을 향해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세상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1월 12일, p.192)


김현경 선생은 환대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긴급한 신앙적 실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교회 사무실 책상 위에는 안드레이 류블로프가 그린 '성 삼위일체' 이콘이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이야기, 곧 아브라함이 낯선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대접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그림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들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그 천사들을 삼위일체로 표상했습니다. 그 성화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심란했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착한 마음이 절로 솟아나옵니다. 옛 소비에트공화국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류블로프의 그 성화를 가리켜 "증오와 폭력이 더 이상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는 장소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화를 만들 수 있음을 그 성화를 보여줍니다.


교회에 대한 절망의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려면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증오와 폭력이 넘치는 거리에서 서성이던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설 땅을 얻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쉼을 통해 얻어진 힘으로 황막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다면, 옛 선지자의 비전 곧 광야에 물이 흐르고, 광야에 꽃이 피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꽃의 계절에 우리 가슴에도 그런 꽃 한 송이 피어나면 참 좋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이 잘 열려, 찾아오는 모든 이들과 잘 어울리며 지내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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