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10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뒷주머니의 욕망

부분과 전체
예수로 인해 공회가 소집되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의논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11:47-48). 그들은 예수라는 존재로 인해 안일한 현실(status quo)의 토대가 흔들릴까봐 두려워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리고, 그로 인해 민중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반역의 충동이 깨어난다면 굴욕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던 평화가 깨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로마의 폭력적 개입을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할 때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11:50). 그는 전체를 위해서라면 한 사람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이 벌인 전쟁에서 전투원이 아닌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전쟁을 기획한 이들은 그것은 전쟁 상황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부수적 손실(collateral loss)이라 말한다. 가야바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한 가지 예를 든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1)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상황이 위급할 때면 사람들은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자기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한다. 노골적으로 자기 욕망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황만 무르익으면 희생자를 지목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인간의 존엄은 유지되는 법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들’은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에서 벌어진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다. 칼레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던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마침내 칼레를 함락시켰을 때 시민들 전체를 몰살시키려 했다. 그러나 칼레를 대표한 사절단과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모든 시민들의 처형을 보류하는 대신, 그들이 뽑은 칼레의 시민 6명을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전체를 위해 희생할 6명을 뽑는 일이 참 난감했다. 그때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를 먼저 나섰고,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 다섯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자루옷을 입은 채 영국군 앞에 섰다. 로댕은 그 비장한 순간을 형상화했다. 굳게 다문 입, 역사의 비애를 짊어진 어깨,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얼마나 비루한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은 얼마나 장엄한가.

분열 속에 있는 인간
한 사람의 이기적인 선택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도 있다. 억압의 땅 애굽을 벗어난 탈출 공동체는 40년의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바야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방까지 물이 차오른 요단강은 언약궤를 앞세운 제사장과 이스라엘 앞에 순하게 길을 열어 주었다. 사람들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고, 열두 개의 돌을 주워 기념비로 세웠다. 길갈에 이르러서는 애굽에서 겪었던 수치를 없애 버린다는 의미로 할례를 행했다. 강성했던 여리고 성도 함락시켰다.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하는 법. 기세등등하게 서진을 계속하던 출애굽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던 구릉지대의 성읍 아이(Ai)에 이르렀다. 

사령관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냈고, 정탐꾼들은 돌아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 성쯤은 정복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보고했다. 여호수아는 3천 명의 군사를 보내 아이 성을 치게 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실제로 이 성읍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고작해야 1,000명 정도였다니 전술적으로 보아도 꽤 적절한 조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최초로 경험한 패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은 오그라들었고, 여호수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저녁때까지 있었다.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입을 열어 하나님께 여쭙는다. 이번 패전으로 인해 주변 부족들은 자기들을 만만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면서, 주님의 명성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패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식으로 불퉁거렸지만, 하나님은 패전의 책임이 백성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7:11)

누군가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사취했던 것이다. 전리품을 나누어갖는 것이 고대인들의 관습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불경한 행위로 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었다. 왕들은 출정하기에 앞서 예언자들이나 샤먼을 통해 신의 뜻을 물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은 다른 신들에게 속해 있던 것들을 태워 없앰으로써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소위 절멸 규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규정을 어김으로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어떤 승리도 기약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 죄인을 찾기 위해 지파별로 사람들을 소집하고 제비를 뽑도록 했다. 그 원시적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아간(Archan)이 범인임이 밝혀졌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아간은 순순히 자기의 범죄를 자백한다. 전리품 가운데서 시날 지역에서 수입해 온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를 하나 숨겼다는 것이다. 1세겔이 11.5g 정도 되니까 은 이백 세겔이면 2.3kg이 되고,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는 약575g이니까 지금으로 치면 약 153돈에 해당된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그의 도덕적 자아는 눈을 감았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모순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지 않던가? 그가 유난히 나쁜 사람 혹은 욕심 사나운 사람이라 볼 수는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분열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야수도 아니지만 천사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한편에서는 야수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연적 욕망과 충동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야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이 두 가지 본성은 결코 최종적인 화해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면이란 영원한 싸움터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욕망과 양심이 끝없이 부딪치는 싸움터인 것입니다.”2)

아간은 자연적 욕망과 충동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일 뿐이다. 그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는 순간 그의 양심은 작동하기를 멈췄던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유화하려는 욕심이 결국은 출애굽 공동체 전체에 큰 해를 끼쳤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백성을 괴롭히는 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간의 이름은 ‘괴롭히다’는 뜻의 아갈과 유사하고, 그가 죽은 ‘아골’ 골짜기도 고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골 골짜기는 백성들에게 아간의 죽음과 맞물려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또 그의 이름은 한 개인의 탐심이 한 공동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다.

탐욕, 허위의식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친 처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비상한 시기에 벌어진 이 사건은 미지근하게 처리될 수 없었다.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한 사건도 이와 유사하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던 초대교인들은 사람들 사이에 드리웠던 분열의 장벽들이 허물어지는 감격을 목도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자기들의 재산을 내놓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재산 가운데 일부를 숨겼다. 자기들의 미래를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성적인 조치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사실을 숨기고 마치 가져온 것이 전부인양 처신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악하다 규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허영심의 노예일 뿐이다. “허영이란 자신의 참된 가치, 즉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자신에게 주는 평가보다도 높은 평가를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다”3)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허영심과 결합시킴으로 그들은 파멸의 운명을 맞았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무지이다. 이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종류의 불행이 어디에서 닥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등에 대한 무지이다. 둘째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무기력이다. 이것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예나 지금이야 앞으로나) 앞의 두 이유에서 파생하는 굴욕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불행에 따른 손상의 많은 부분이 신호를 제때 탐지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부주의, 지나친 꾸물거림, 게으름, 의지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감이 입게 되는 상처이다.”4)

무지, 무력감, 굴욕감을 탓할 수는 없다. 무정한 세상, 각자도생을 요구받는 사회에서 오래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포가 내면화 된다. 경쟁을 삶의 원리로 삼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공동체적 연대(solidarity)는 느슨해지고, 존재론적 쓸쓸함(solitary)이 우리 삶을 확고히 포박한다. 서로에 대한 환대(hospitality)의 마음이 흐릿해질 때 적의(hostility)가 슬며시 우리 의식을 장악한다. 세속적 지혜는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방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경쟁은 인간들의 본능에 속한 것일까? 칠레의 경제학자인 만프레트 막스 네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산업 국가나 서구인들이 어긋나 있는 점은, 경제적 맥락에서의 경쟁을 항상 바람직하게 보는 강박 관념입니다.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문화 덕분에 지금껏 인류가 존속하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탐욕과 경쟁은 한참 뒤에 생겨난 개념입니다.“5)

비본래적인 것이 본래적인 것을 몰아내고 있다. 아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유화함으로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렸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허위의식을 작동시킴으로 초대교회를 내적으로 뒤흔들었다. 출애굽 공동체와 초대 교회가 그들의 행위를 가혹할 정도로 엄중하게 다룬 것은 누구라도 그런 위험한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아간‘들의 나라
아간 류의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공적인 것을 사유화함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통해 권력까지 누리는 이들이 많다. 공적 자금을 유용하는 이들, 방산 비리를 저지르는 파렴치한 사람들, 개발 정보를 미리 얻어 땅을 구입해 막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어쩜 이리 많을까.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이들이 아주 경미한 처벌만 받고 사회로 복귀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았기에 사람들은 사회 정의를 믿지 않는다.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에만 국한시켜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고, 공적인 일에 무관심할 때 아간 류의 사람들은 즐겁게 교회로 숨어든다.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를 세상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교단법에 의해 금지된 일을 해도 그가 막대한 물적·인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면벌부를 주는 현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성과주의가 양심의 숫돌이어야 할 종교조차 타락시키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는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민11:34)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두려운 일이다.

아간 류(類)의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이 판을 치는 시대는 살 만한 시대가 아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파렴치한 이기심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 우리는 인정의 황무지를 걷고 있다. 부동산 불패 신화에 기대어 불로소득을 노리는 사람들, 개발 이익을 독점하는 사람들, 투기 자본을 활용하여 가난한 이들의 재산마저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는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이들의 피눈물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 많은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고마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가진 것, 배운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그저 나누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참 사람이다.

아간 류의 사람들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제 좋을 대로 살 뿐이다. 말장난이지만 ‘아간’은 ‘악한惡漢’이다. 그들은 영적인 미숙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 전철역에서 빌려주는 우산이 채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다 사라지고 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전유해버리는 일도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디엠비를 크게 튼 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이들,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살겠다는 결의는 장하지만, 그들이 다른 이들의 심령에 가하는 폭력은 심각하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고 믿음이다. “현대 사회의 특이한 병리 현상은 마땅히 공동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사유화한다는 사실이다.”6)

새로운 연대를 향하여
아간 류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이들을 백안시 하거나 경멸할 수도 없다. 삶이 그만큼 불안해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점점 커지고, 그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다. 일확천금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남의 일일 뿐이다. 경쟁에서 한번 밀려나면 결국 영원히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애써 견디며 사는 동안 타자를 위한 마음의 여백은 줄어든다.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다. 남들보다 잘 살지는 못해도 남보다 못 살기는 싫다. 안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김종철 교수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범죄적인 개념인가를 생각해야”7)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해온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자립적인 생존의 항구적인 기반을 망가뜨리는 데 기여해왔고, 나라 안팎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해왔으며, 또한 우리의 진실한 내면적인 삶을 황폐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8)는 것이다.

풍요로움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는 순간 모든 인간적인 가치들은 뒤로 밀리고, 고립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믿음직한 생활방식인 협동의 삶, 연대의 삶은 호사가들의 허영심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아간들의 나라에서는 의초로운 평화도 살가운 생명도 깃들 곳이 없다. 몰강스럽고 시뜻한 현실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하여 연대의 가치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생명은 서로 이어져 있고, 평화란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세상,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은 우리 가운데서 유배된 자비를 다시 회복하는 데 있다. 영성신학자인 매튜 폭스는 자비심은 “우리 모두의 상호 관계성을 깨달음으로써 발동된다”9)고 말한다. 자비는 일체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매튜는 더 나아가 자비란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며,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뭐니뭐니 해도 ‘축제‘와 ‘슬픔’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려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자비라는 말이다. 아간 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은 나눌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향락을 누리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여 축제를 즐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우리 시대가 풍요로움 속에서도 빈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간은 자기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택했지만 그것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간이 죽임을 당한 아골 골짜기는 우리에게 가장 무섭고 황량한 곳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찬송가 323장(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아골 골짝 빈들’이라는 은유를 통해 부름 받은 이들이 처하게 될 극한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그 아골 골짜기를 희망이 시작되는 곳으로 선언한다.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익명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사65:10)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호세아는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지속될 것임을 예고하면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면 어디서 희망을 말하겠는가? 아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겪었던 시련을 상기시키는 곳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낯선 곳,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는 ‘아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웃이다.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뒤처지면 기다려주면서 더디다 못 났다 탓하지 않는 사람,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주고 조각난 마음을 기워주는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추기는 사람 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치유 받은 마음을 신에게 바치며 이렇게 노래한다. 이것이 우리의 노래가 되었으면.

“나의 치욕의 모든 조각들을 꿰매어/이제 나는 다시 복구되었습니다,/이제 나를 마치 사물처럼 바라볼/하나의 유대(紐帶), 합일된 오성을/그리고 당신의 가슴의 그 위대한 손을/나는 갈망합니다/(오 그 손이 나를 향해서 다가와준다면)./나의 신이여, 나는 스스로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당신,/당신은 나를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10)



주)
1.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137
2.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 2000년 10월 20일, p.276-7
3. 도메 다쿠오,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2015년 11월 11일, p.78
4.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최호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년 11월 27일, p.174
5. 게세코 폰 뤼프케·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희망을 찾는가>, 김시형 옮김, 갈라파고스, 2011년 4월 1일, p.99
6. 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십계명>, 강봉재 옮김, 복 있는 사람, 2007년 10월 24일, p.162
7. 김종철, <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 1999년 7월 10일, p.165
8. 김종철, 앞의 책, p.164
9 매튜 폭스, <영성-자비의 힘>, 김순현 옮김, 다산글방, 2002년 4월 10일, p.37
10.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전집1, 기도시집 外, 김재혁 옮김, 책세상, 2000년 2월 10일,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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