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11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광장에 세운 금신상
   -느부갓네살 이야기

느부갓네살
성경에 등장하는 이방 나라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느부갓네살이 아닐까싶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깊이 연루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픔과 치욕의 기억을 가급적이면 빨리 지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기억을 끝없이 반추하는 길을 택했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자비를 들여 곳곳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짓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신바벨론제국(Neo-Baylonian Empire, 주전626-539)을 중흥시킨 인물이다.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름은 ‘느부(느보) 신이 경계석을 지킨다’ 혹은 ‘느부가 계승권을 지킨다’는 뜻이다. 느부(느보)는 바벨론의 최고신인 벨(마르둑의 별칭)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지혜의 신으로 숭상되었다고 한다. 이사야서에 이들이 등장한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46:1). 이사야는 가장 강성하던 바벨론의 정신적 토대라 할 수 있는 벨과 느보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다. 바벨론 사람들은 벨과 느보 신상을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성내를 행진하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 땅이 그 신들에게 속했음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일종의 상징행위였다. 이사야는 그런 세태를 뒤집어 짐승들의 무거운 짐으로 전락한 벨과 느보의 처량한 신세를 그려 보이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역사의 무대에 가장 화려하게 등장한 무대는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였다. 앗시리아를 멸망시키면서 근동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신바벨론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애굽왕 느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계획했다. 애굽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친바벨론 정책을 펼치던 유다의 요시야 임금은 느고를 막으려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음으로 신명기법전을 토대로 하여 종교 및 사회개혁을 단행하려던 그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느고는 그 기세를 몰아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갈그미스까지 올라가 바벨론과 일전을 치르려 했다. 갈그미스는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알레포에서 북동쪽으로 100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지금의 제라불루스 지역이다. 그곳은 시리아에서 유프라테스 지역을 오가는 관문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은 대승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애굽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여호야김은 상황을 오판한 채 친애굽 정책을 펼치다가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았고, 그 전투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갔다.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채 가까스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년간 바벨론을 섬기던 그는 배반을 감행했다가 쇠사슬에 결박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때 여호와의 전 기구들도 약탈당하고 말았다(대하36:6-7).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십팔 세에(역대기는 팔 세로 소개됨, 대하36:9) 왕위에 등극하지만, 그는 겨우 석 달간 동안 다스리다가 느부갓네살이 성을 포위하자 자발적으로 굴복하여 목숨을 부지한다. 그때 바벨론 군대는 성전 안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함은 물론,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금그릇들을 깨뜨려 약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갔다. 왕과 그 가족은 물론이고 제국의 확장에 필요하다고 판단된 지도자, 용사, 장인, 대장장이들이 다 포함되었다(왕하24:8-14).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숙부였던 맛다니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시드기야라는 이름을 부여했지만 그는 유다 최후의 임금이 되었다. 자기 힘을 오판한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저항하다가 결국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느부갓네살은 불구대천의 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악마적 존재로 형상화하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린 채 살아가던 그 백성을 징치하기 위해 세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소개한다. 그렇다고 하여 느부갓네살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폭력성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서에 재등장한다. 다니엘서는 알렉산더 사후에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셀류커스 왕조의 억압과 학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모든 묵시문학이 그러하듯이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에 빗대 자기 시대를 해석한다. 다니엘서가 기대고 있는 것이 바로 바벨론 제국에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포로민들의 상황이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이들이 겪는 격절감을 이상화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했지만,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이들의 곤고함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니엘서는 원수의 땅에서 그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기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동시에 민족적·신앙적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다니엘서는 예언인 동시에 풍자이다. 느부갓네살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그러나 뒤숭숭한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도무지 그 꿈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성경에서 꿈은 일쑤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통로로 소개된다. 사라를 취하려 했다가 경고를 받은 그랄 왕 아비멜렉의 꿈(창20:3), 베델에서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본 야곱의 꿈(창28:12), 자기의 장래를 예시하는 요셉의 꿈(창37장),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창40:5),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마2:12, 22), 빌라도의 아내의 꿈(마27:19) 등이 대표적이다. 

해석은 다른 사람이 하더라도 꿈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술사들을 불러들여 자기가 꿈 꾼의 내용과 해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단2:5)이라는 것이다.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다.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라는 말 속에 일탈한 권력의 오만이 담겨있다. 권력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려 하지 않는다. 오도된 권력은 자기 이외의 모든 대상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입함으로 자기를 신화화한다. 사람들의 내면에 뿌려진 공포의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 마침내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만다.

아무리 지엄한 명령이라 해도 남이 꾼 꿈을 기억해 낼 수는 없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던 모든 지식인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다니엘이 소환된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느부갓네살이 꾼 꿈의 내용을 기억 속으로 소환하는 동시에 그 꿈에 내포된 의미도 밝혀낸다. 왕이 본 것은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쇠요 발은 쇠와 진흙으로 구성된 큰 신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 하나가 등장하여 그 신상을 철저하게 파괴했고, 그 장엄하던 신상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흩어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 꿈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나라들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총화단결의 위험
다니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제국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넌지시 드러낸다. 거침없고 파괴적이고 신성모독적인 나라들은 불패의 신화를 써가고 싶겠지만, 그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뿐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뿐이다. 어찌 보면 불쾌한 신탁이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예물과 향품을 주면서 말한다.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단2:47). 이 이야기는 억압과 학대의 현실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희망의 초석이었다. 유다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나눔으로 현실이 비록 암담하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땅 위에 굳게 설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겼던 것이다.

권력의 유한함을 깨달았다 하여 권력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느부갓네살은 여전히 강대한 제국의 왕이었고, 그의 몰락은 아직 미지의 현실일 뿐이었다. 자기 확장욕에 사로잡힌 느부갓네살은 제국을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만든다. 그는 높이 육십 규빗이나 되는 금 신상을 만들어서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다. 그는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금 신상 낙성식에 참여하도록 강제한다(단3:2).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가 동원되었다. 다양한 소리가 빚어내는 수선스러움 속에서 성찰적 지성은 작동되지 않는다. 그 악기 소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신호였다 엎드려 절하지 않는 이들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으름장도 빠지지 않았다. 악기 소리가 나자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다. 금 신상은 제국의 위엄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일사불란‘, ‘총화단결‘의 상징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잉여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나 아렌트는 19세기 유럽의 역사를 ‘국민국가’의 형성을 둘러싼 역사로 규정하면서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려면 그때까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던 ‘국민’의 구성원이 영토적, 정치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 동시에 ‘국가’의 이질적 요소(=타국민, 타민족)를 최대한 배제하여 동질성과 구심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자신들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자기들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고 따돌리지 않으면 자기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

국민국가는 이질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라는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그들‘을 불온시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동화시켜려 했다. 다름은 용납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은 바로 이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제국의 통치 전략이었다.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는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오직 야웨만이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유대인들은 양날 칼을 손으로 쥔 격이 되었다. 금 신상 앞에 절하는 순간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화인 맞은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런 곤경 속에서 신앙인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관료로 발탁되어 바벨론 제국의 일부가 되었던 이들을 바라보는 갈대아인들의 시선이 고왔을 리 없다. 자기들에게 돌아갈 자리를 엉뚱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질적인 존재임을 입증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즉각 왕에게 고발했다. 느부갓네살은 몹시 노했다. 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자기가 키운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느부갓네살은 그 금 신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동상의 욕망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 나환자들이 수용되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의 서사는 조백헌 원장의 취임과 더불어 시작된다. 야심만만했던 그는 소록도를 천국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그는 몇 가지 혁신적인 조치를 내린다. 위생복, 위생장갑에 마스크까지 덮어 쓰고도 원생들에게 핀셋을 사용하는 따위의 태도를 버릴 것,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마스크나 위생장갑의 착용 금지, 환자들이 건강인을 대할 때마다 4,5보 거리에서 얼굴을 반쯤 옆으로 돌리고 입까지 손으로 가리고서야 말을 건네야 했던 교칙들의 폐지,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의 경계를 가르고 있던 철조망 철거, 미감아 아동들과 직원 지대 아이들의 공학 단행 등이 그것이다. 조백헌 원장의 그런 혁신적인 조치들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그 섬에 머물렀던 이들은 그것을 일종의 “거인증의 발로”로 폄하한다2)

그들은 쓰라린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상욱 과장은 조백헌 원장에게 그의 전임자인 주정수 원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섬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싶었던 그는 각 마을에서 환자 대표 열 명을 뽑아 평의회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새로운 병원 시책의 결정 과정에서 원장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고 동환들의 권익을 대표하여 그들의 의사를 집약하고 반영하는 반자치 반자문 기구 비슷한“3) 것이었다. 문제는 평의회의 권한이 주정수 원장이 허용하는 통치 원칙의 한계 안에서만 작동된다는 것이었다. 섬의 전권을 쥐고 있는 원장을 갈아치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평의회 의원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에서 권력의 맛을 본 후에, 환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원장의 아량과 관용의 한계 안에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다스리는 자의 쪽에 서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평의회는 마침내 주정수 원장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동상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더욱 충성스러워지려 애썼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보은 감사일마다 동상 앞에서 원장의 송가를 부르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파국의 전조였다. 선의는 자기 보존 욕망과 결부될 때 강박관념으로 변하게 마련이고, 강박관념은 퇴행적이어서 파탄으로 귀착되는 법이다. 결국 그런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 의해 평의회 사람 하나가 살해되었고 이어 원장도 살해되고 말았다.

이청준이 이 소설을 쓴 것은 1974년부터 75년 사이였고 1976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긴급조치가 발동되던 시기였다. 작가는 권력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낙원의 꿈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한 시대의 양심의 척도인 작가는 그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청준은 1984년에 간행한 개판본 서문에서 소설 제목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힌다. 

“굳이 사족을 더할 바가 없겠지만,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天國>은 당시 우리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寓意性에 근거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땐가 그것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어 불려질 때가 오기를 소망했고, 필경은 그때가 오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오게 되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斜視的 표현이나 그 책의 존재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4)

작가는 자유가 압살되고 있던 현실 속에서 강고한 체제의 틈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해설한 김현은 “자유 없는 힘은 끊임없는 배반만을, 사랑 없는 힘은 강요된 의무만을 낳을 뿐”이라면서 진짜 천국은 누군가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5)고 말한다. 시날 평지에 세워졌던 바벨탑은 돌 대신 벽돌이, 진흙 대신 역청이 사용되었다. 틀 속에서 찍힌 벽돌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역청 또한 자유스러운 소통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국의 특색이 이러하다.

반항적 인간
다시 다니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대규모의 국가 제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들은 담대하게 좁은 길을 택했다. 왕 앞에 소환된 그들은 금 신상 앞에 절하라는 회유를 거절한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들은 당당하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지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b-18)

카뮈가 말하는 반항적 인간의 초상이 이러할 것이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죽기보다는 서서 죽기를 구하는 자이다. 카뮈는 원한과 반항을 구별한다. “원한이란 셸러가 적절하게 정의했듯이 자기 중독이요, 밀폐된 병 속에서 무력감이 계속됨으로써 생겨난 불건전한 분비물이다. 그와 반대로 반항은 존재를 터뜨리고 부수어 밖으로 넘쳐나도록 돕는다.”6) 국가의 권세가 시민의 양심에 반하는 일을 강요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장엄한가. 다니엘서는 제국의 권세보다 더 큰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결국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그 뜨거운 화염은 그들의 털끝 하나 태울 수 없었다.

다니엘서는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오롯이 드러낸다. 그의 꿈은 이러하다. 땅의 중앙에 있는 한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높이가 하늘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잎사귀가 무성해지면서 열매도 풍성하게 달렸다. 공중을 나는 새가 그 나뭇가지에 깃들었고 그 그늘 아래서 뭇 생물들이 먹을 것을 얻었다. 그런데 한 순찰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나무는 베어 넘겨지고, 열매는 흩어지고, 짐승들과 새들도 황급히 그 품을 떠나고, 오직 그루터기만 땅에 남게 되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단4:16)는 선고를 듣는다. 번민 끝에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한다. 그 큰 나무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킨다. 하늘에 닿을 듯 오만에 빠졌던 권력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고,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왕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짐승들처럼 지낼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정해져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그는 회복될 것이다. 다니엘은 이어 왕이 해야 할 일을 전한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4:27).

자기 자신의 적은 바로 자기
다니엘의 꿈 해석 혹은 예언은 성공을 거두었을까? 예언의 성공은 예언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언의 목표는 미래의 예견이 아니라 현재 상황의 변화에 있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통해 예고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을 통해 예고된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예언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서도 일하신다. 다니엘서는 느부갓네살을 일인칭 화자로 삼아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단4:28)라고 말한다. 강력한 증언이다. 그가 바벨론을 자기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자기 도성으로 삼고 자기 위엄의 영광을 드러냈다고 자고하는 순간 그 모든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그의 왕좌를 빼앗았을까?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었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누구에 의해 왕홀을 빼앗기게 되냐는 이오의 질문에 “어리석은 계획에 의하여 그 자신이 자신에게서 빼앗게 되지요”7)라고 대답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적인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기한이 차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돌아왔다고 고백한다. 그는 마침내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4:37). 이방인 왕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던 이들에게 큰 위안과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동상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다. 시간이 초래하는 소멸을 공포로 느끼는 이들은 자기들의 흔적을 시간 속에 새겨놓고 싶어한다.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으로 건물을 짓기도 하고, 지위를 자식에게 대물림하기도 한다. 동상은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욕망이다. 우상 없이 기다릴 수 없는 이들이 동상을 만든다. 하나님 안에서는 망각 혹은 소멸조차 복이다. 그분 안에서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의 느부가느네잘 대왕이 하느님을 찬양코자 했을 때 한 천사가 오더니 그의 얼굴을 때렸다.“ 코츠커는 물었다. “그의 의도는 하느님을 찬양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얼굴을 맞아야 했는가?“ 그는 스스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는 한편 왕관을 쓰고 있으면서 찬양하겠다는 것이냐? 어디 얼굴을 맞은 다음에 어떻게 찬양하는가 들어봐야겠다.”8)

왕관을 벗지 않고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동상의 욕망을 내려놓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몰락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
1. 나카마사 마사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2017년 3월 14일, p.47-8
2. 이청준, 당신들의 天國, 문학과지성사, 1993년 1월 25일, p.79
3. 이청준, 앞의 책, p.81ff
4. 이청준, 앞의 책, iv
5. 이청준, 앞의 책,, p.384ff
6.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7년 12월 15일, p.38
7.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10월 5일, p.237
8.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7,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5년 3월 20일,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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