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13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뒤를 돌아본 사람
    -롯의 아내

도시의 유혹
모든 일은 가족들을 다 데리고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네게브 광야에 잠시 정착했지만, 더 넓은 목초지를 찾아 벧엘과 아이 사이로 장막을 옮겨야 했다. 유목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홀가분하지만 고단한 일이다. 목초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샘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축을 돌보던 아브람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풍부했다면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나눠야 하니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뭄이 들면 정답던 이웃끼리 낫을 들기도 하지 않던가.

인문 지리학자들은 일인당 밀 소비량과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계산해서 1제곱킬로미터의 경작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수를 계산한다고 한다. 식량을 자급할 수 없을 때 농부들은 다른 땅으로 이주하거나 다른 부족을 약탈함으로 부족분을 채우려 했다1). 고대 세계의 전쟁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유목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브람의 종들과 롯의 종들의 갈등은 자칫하면 친족 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아브람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불화하며 사는 것보다는, 서로 떨어져 지내자고 롯에게 말한다. 롯도 동의한다. 어린 시절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삼촌의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살던 그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아브람은 기꺼이 선택권을 롯에게 넘긴다. 불화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13:9-11)

롯이 망설임 없이 물이 넉넉한 땅,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요단 지역을 택한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기보다는 안락한 환경에 동화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주를 거듭하며 소돔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그 성에 정착한다. 부족 간의 전쟁이 잦았던 그 시절에 ‘성 안‘ 주민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 경비원이 딸린 게이티드 하우스(gated house)에 사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성곽이 있는 도시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도시는 또한 주민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양한 활동과 유의미한 교류가 일어나고 계층상승의 기회 또한 주어진다. 롯은 그런 도시생활에 잘 적응했다. 천사가 그 도시를 찾아왔을 때 그는 성문 앞에 앉아 있었다. 성문 앞에 앉았다는 말은 그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도시의 갈등을 중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나름대로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도시의 주민이 된다는 것이 행복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인구 밀도는 높았고, 위생 시설 또한 턱 없이 부족하여 전염병이라도 돌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도시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보다는 각자도생의 살벌한 경쟁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겉보기에는 풍요롭지만 실상은 가난한 도시, 바로 그것이 소돔이었다. 에스겔은 소돔의 죄를 이렇게 적시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겔16:49-50a)

물질은 풍족했지만 타자에 대한 배려, 특히 궁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은 없는 도시였다는 말이다. ‘태평함’은 평화가 아니라 나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거만함‘과 ‘가증함’이 하나님의 눈에 비친 소돔이었다. 이사야 또한 소돔을 반면교사로 삼자면서 말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3:8-9)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
거침없이 발화되는 폭력적이거나 간사한 언어, 안하무인의 방자한 태도, 교만하게 쳐들린 그들의 얼굴이 마치 소돔을 연상케 한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진 자들의 갑질은 우리 문화의 천박성과 무신성(無神性)을 반증한다. 소돔은 멀리 있지 않다. 돈 없는 이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굴종을 강요함으로 그들의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돈과 권력을 과신하는 이들은 삶의 의미 물음을 묻지 않는다. 의미 물음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발생한다. 하지만 즉물적인 행복에 취해 있는 이들은 성찰을 거부한다. 성찰은 행복의 꿈을 깨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레빈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지주이지만 삶의 의미 물음 앞에서 번번이 좌절을 경험한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인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살아갈 수도 없다“2). 그는 다른 지주들과는 달리 소작인들과의 벽을 허물고 소통하고 싶어한다. 어느 날 타작마당에서 타작꾼 표도르와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 좋은 농부인 플라톤이 토지를 빌리지 않을까 묻자 표도르는 비싼 소작료 때문에 벅찰 거라고 답한다. 집지기인 키릴로프는 잘 하고 있지 않냐고 되묻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몫만은 챙기는 사람이라면서, 그에 비해 플라톤은 결코 다른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레빈이 다시금 플라톤이 왜 그렇게 선하게 사는 거냐고 묻자 표도르는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뜻밖의 대답에 놀란 레빈이 다시 묻는다. “어떻게 하길래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거야?” 표도르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빤하잖아요. 진리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뿐예요.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리만 하더라도 사람을 모욕하는 짓은 하지 않으시니까 말예요……“3). 플라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이 레빈의 마음에 전율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선하게 살지 않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풍요로움을 자랑하던 소돔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의 토대인 정의와 공의의 기둥이 무너진 곳이었고, 향락을 즐기는 이들이 내는 질펀한 소리 저편에서 가난하고 곤고한 이들의 신음소리가 안개처럼 피어나는 곳이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라고 하여 모두 선하지는 않다. 을의 욕망은 갑이 되는 것이라지 않던가. 소돔은 하늘과의 접속을 잃어버린 도시였다. 소돔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현실이 일치하는지를 살피고 심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길을 가던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정성스런 대접을 받고는 자기들이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밝힌다. 천사들이 길을 떠난 후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한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18:23).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이의를 제기한다. 불경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지키기보다는 동료 인간들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 않는다.

환대의 모험
천사가 방문했을 때 롯은 이미 소돔 성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스스로 높은 공적인 지위에 올랐고, 딸들을 그 지역민의 아들들과 맺어줬다. 성경은 그가 그런 위치에 이르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이 소돔 성 주민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들러가 말하는 안전에의 욕구와 더불어 소속의 욕구가 해결된 것이다. 살기 위해 세상을 떠돌던 그가 주류 사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축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 문 앞에 앉아 있던 그는 낯선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다. 일찍이 나그네살이의 괴로움을 맛볼 만큼 맛보았기에 그는 차마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롯 또한 환대의 사람이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환대를 실천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인류학자인 김현경은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4)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시면서 그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것들을 일러주신다. 그 가운데서도 나그네를 푸대접하지 말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출23:9). 신명기는 ‘압제하지 말라’는 소극적 요구를 넘어 “나그네를 사랑하라”(10:19)고 말한다. 나그네 사랑은 하나님의 깊은 관심사이다. 지금 이 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난민들은 어떤 처지에 있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위협을 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말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들이 자기 존엄을 지키며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고,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일이 과연 양립가능한 일일까?

사실 낯선 이들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모험일 수 있다. 롯도 그랬다. 롯의 집에 낯선 이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소돔 성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들어 그의 집을 에워쌌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내라고 요구했다. 롯은 문 밖으로 나가 그들을 설득하려 한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형제’라는 친숙한 언어를 사용한다.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그들에게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 정말 그럴 생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만큼 절실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주민들이 보인 반응은 롯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창19:9). 롯은 스스로 그 성 사람들의 문화와 습속에 동화되었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주민들의 말은 그가 여전히 ‘나그네’라는 사실을 아프게 자각시켰다. 주류 세계에 속했다는 안도감과 그를 든든히 지탱해주던 소속감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는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내침을 당할 수 있는 존재, 호모 사케르(Homo Sacer)5)였다.

버리고 떠나라
주민들은 문을 부수려고 하였다. 폭력의 열정이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천사들이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바깥에 있는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만든다. 그들은 손으로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다. 그 혼란의 와중에 천사들은 소돔에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면서 그에게 속한 이들을 데리고 빨리 소돔을 떠나라고 롯을 재촉한다. 하지만 천사들의 긴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은 주저한다. 죽을 힘을 다하여 성취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난다는 것, 모처럼 누리던 소속감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롯은 사위들에게 천사의 경고를 전하고 함께 떠나자고 말하지만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롯이 누리던 사회적 존경이 위기 앞에서 해체되고 만 것이다. 천사들은 지체하는 롯과 그의 아내와 딸들의 손을 잡아 끌면서 그들을 성 밖으로 인도한 후에 엄히 명령한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 예수님도 인자가 오실 날을 예고하면서 그날은 일상의 안락함 속에 머물 수 없는 날이라고 말하셨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눅17:31).

신앙은 결단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확고히 붙잡아야 한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는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환상에 응답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교회를 재건한다. 아들의 그런 행태가 못마땅했던 아버지 피에트로는 그를 시의 집정관 앞에 데려간다. 아들이 더 이상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체스코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물은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준다. 상속권의 포기를 상징하는 행위였지만 그는 벌거벗음을 통해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신앙이란 이처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6) ‘이것도, 저것도‘(both and)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라는 말이다.

천사는 마음이 급하지만 롯은 여전히 주저한다. 그리고 산보다는 가깝고 작은 성읍으로 피신하게 해달라 청한다. 소속된 사람들과 장소로부터 멀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천사는 그런 청까지도 들어준다. 그래서 롯은 소알로 피신한다. 그때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고, 성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이 다 파괴되었다.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심판의 변형이다.

성서의 이야기꾼은 이 사건을 기록한 후에 마치 사족처럼 한 마디를 덧붙인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너무나 간결한 진술이다. 구구한 설명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금 기둥으로 변한 사람이라니! 사해 근처를 둘러본 이들은 기기묘묘한 모양의 소금 기둥들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가시적인 그 기둥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섬 지역 사람들은 기묘한 형태의 바위마다 이름을 붙여주거나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우리 산하에 무심히 피어나는 꽃들,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야생화도 저마다의 사연과 더불어 기억되지 않던가. 신화, 민담, 전설 등의 설화 문학은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민중들의 절절한 삶의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동체가 구술해주는 그런 이야기들은 민중적 에토스를 형성하는 거름이 된다.

여하튼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사람들은 아주 쉽게 롯의 아내의 불신앙 혹은 불순종을 거론한다. 소금 기둥으로의 변화는 옛 삶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라는 것이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롯의 아내는 그렇게 하여 애도조차 받지 못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리석은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외경인 지혜서도 롯의 아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저지른 악의 증거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줄곧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무지, 때가 되어도 익지 않는 열매를 매단 나무들, 믿지 않는 영혼의 기념비로 서 있는 소금 기둥이다”(지혜10:7)

금기 앞에서
종교학적으로 본다면 롯의 아내는 ‘금기’를 범한 사람이다.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은 성과 속의, 신적인 세계와 인간 세계의 경계를 침범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은 인간에게 가려져 있다.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인간은 그 경계를 지킬 때 안전하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은 불을 화로에 담았다가 죽임을 당했고(레10:1-2),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가 날뛰면서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거기에 손을 댔던 웃사 또한 죽음을 당했다(삼하6:6-7).

금기는 지켜져야 한다. 신성하다고 여겨지거나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금기를 범함으로 사람들은 차이를 소멸시킨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에 까지 내려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오던 오르페우스는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아내를 스올로 떠나보내야 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롯의 아내를 불신앙의 표본으로 가둬버리기보다는, 그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를 헤아려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시인 바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롯의 부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죽는다 해도 남편은 절대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는 갑작스러운 확신 때문에.
과격하지 않은 가벼운 반항심이 솟구쳐 올라.
추격자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적막 속에서 문득 신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기에.
우리의 두 딸이 언덕 꼭대기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문득 스스로가 늙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방랑의 덧없음과 쏟아지는 졸음 탓에.
대지 위에 꾸러미를 내려놓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걷고 있는 오솔길에 갑자기 뱀이 나타났기에.
거미와 들쥐와 어린 독수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기에.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그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거대한 패닉 상태에 빠져 꿈틀대고, 튀어 오르는 걸 바라보면서.
갑작스런 외로움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몰래 도망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소리치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하략)“7)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사람의 어떤 선택에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걸려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선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도 흔들린다. 오직 죽은 고사목만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지 않던가. 어떤 결정을 내린 후에도 금방 후회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인가? 이것을 선택 이후의 부조화(post-decision dissonance)라 한다.8) 어떤 사람의 선택 혹은 행위를 순종과 불순종의 도식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러한 기준을 수호한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권력을 누린다.

누구의 행동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옛 삶의 인력을 떨쳐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과거의 안락한 토대에 기대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삶을 거는 행위야말로 신앙적 행위이다. 신앙인은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vorblick) 사람이다.

“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고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이리.”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 십이곡> 중 아홉 번째 노래이다. ‘녀다’라는 말은 ‘가다, 행하다’를 뜻하는 옛말이다. 옛 성현들을 지금 볼 수 없고, 성현들도 나를 볼 수 없지만 그들이 걷던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아니 걸을 수 없다는 노래이다. 남을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 옷자락을 붙잡는 옛 삶의 인력을 끊어내며 앞을 향해 발돋움 하는 것, 미련과 아쉬움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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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남영우, <땅의 문명>, 문학사상, 2018년 10월 30일, p.34-35 참조.
2.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3>,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7년 8월 11일, p.469
3. 레프 톨스토이, 앞의 책, p.479
4.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1월 12일, p.193
5. 조르조 아감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용어로 법적인 권리와 보호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을 뜻한다. 이들은 언제라도 희생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참고)
6. ‘벌거벗음’이라는 주제가 프란체스코의 신앙 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김기석 옮김, 포이에마, 2010년 12월 24일, p.44-54 참고
7.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p.228-9
8. Jonathan Sacks,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 Maggid Books, 2009, p.113-11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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