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운 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2019년 01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새로운 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을 향해 ‘빛이 생겨라’(창1:3) 하신 주님,
세상은 여전히 어둡지만 주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두려움 없습니다.
올 한 해도 주님이 주신 빛을 받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주님이 주신 소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역사는 진보하는가? 그렇게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한 생각에 제동을 건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흉포해지고,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개별화한다.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사귐을 통해 얻는 행복의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곁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존재가 아니라 행복의 기회를 나에게서 앗아갈 수도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각자에게 품부된 생명을 한껏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을 이루는 것을 진보라 말한다면, 오늘의 현실은 퇴행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과 절망감이 우리를 엄습한다. 폭력과 부패가 세상에 만연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인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도를 넘고 있다. 진리의 이름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수치심을 안겨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인이라 하여 예외가 아니다. 오늘의 교회는 초월의 빛을 비추어 세상을 향도하는 본연의 역할을 잊고, 세상의 문법과 논리를 내면화한 채 오탁의 거리를 바장이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자유의 새 땅에 이르기 위해 광야를 가로지르기보다는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 삶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이미 낡아버린 시간을 어떻게 갱신해야 할지 고민이다. 달력을 바꿔달고, 수첩을 정리한다고 시간이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옛 생활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푸른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새롭다는 뜻의 한자 ‘신新‘은 서 있는(立) 나무(木) 옆에 도끼(斤)가 놓인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살아 있는 나무에 도낏날이 박힐 때 대기 중에 번지는 선연한 향기를 떠올리는 것이 새롭다는 뜻일까? 새로움은 언제나 옛 것의 부정과 연관된다. 새로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어지럼증은 옛것과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런 단절 혹은 상처가 없다면 새로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아니, 소멸의 인력에 끌려간다. 인간의 비애는 소멸의 예감과 소멸을 거스르려는 본능 사이에서 빚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비애의 포로로 사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인간에게는 사멸성에 맞서는 건강한 ‘탄생성’(natality)이 있다고 말한다. 탄생성이란 운명 혹은 심연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인력에 저항하며 자유와 생명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탄생성은 어쩌면 인간이 성취해야 할 소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탄생성은 자기 속에서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야 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장엄한 말이다.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전환을 이렇게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다니. 그러나 다음 구절은 다른 상황을 드러낸다. 땅에는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학자들은 창세기 기자가 혼돈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마르둑이 그 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다는 바벨론 창세 설화를 염두에 두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혼돈’, ‘공허’, ‘흑암’은 시간 속을 걸어가는 이들이 일쑤 경험하는 현실이다. 옳음과 그름,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미와 무의미, 빛과 어둠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삶에 갈마든다. 그리고 부정적인 경험들은 우리 영혼에 푸른 낙인을 찍는다. 낙인 찍힌 자는 사소한 자극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이게 우리 삶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낡은 시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 계시다. 

성서의 하나님은 세상에서 낙인 찍힌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 스스로 삶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는 이들을 품에 안으시는 분, 그들의 가슴에 서린 얼음을 사랑으로 녹여내시는 분이시다. 역사의 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훈풍을 불어넣으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에너지로 가득 찬 그 말씀이 떨어지자 세상에 빛이 도래했다. 해와 달과 별과는 다른 빛, 근원적인 빛, 꺼질 수 없는 희망의 빛이다. 그 빛이 지금 우리 앞에 당도했다. 시간의 새로움 혹은 역사의 새로움은 이렇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선물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눈을 뜬 사람이다. 그들은 덧없는 것들 속에서 신적 광휘를 본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던 세상이 돌연 은총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때 세상에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외심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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