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아름다운 저항을 꿈꾼다 2019년 03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아름다운 저항을 꿈꾼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를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다. 믿음은 담대한 희망이라 말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마음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인간이라면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현실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과 무자비한 폭력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나님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질서를 혼돈으로 되돌린다.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감으로 인해 과거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갈구했는지도 모르겠다.

떨어져서 바라보면 뚜렷하게 보이는 것도 정작 그 안에 있는 이들은 보지 못할 때가 많다. 패거리 의식이 성찰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교회는 ‘당신들의 천국’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진보하고 있지만 교회는 어제 부른 노래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초월의 방향으로 견인하지도 못하고, 쇠북소리처럼 쟁쟁 울리는 목소리로 세상의 악을 꾸짖지도 못한다. 파수꾼의 소명을 방기한지 이미 오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색할 지경이다.

너무 비관적인가? 지금은 울 때다. 옷이 아니라 가슴을 찢어야 할 때이다.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참과 거짓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고 있다. 앞 못 보는 사람이 앞 못 보는 사람을 인도하는 형국이다. 이제는 이들에게 붙잡힌 손을 뿌리쳐야 한다. 그래야 공멸을 면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모토처럼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

영국 작가인 앤소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나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어둠이 지극하던 그 시대에도 짙은 구름을 뚫고 새어나오는 햇빛처럼 세상을 비추던 이들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치의 점령지였던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할머니들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을 시작했다. 나치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도로 표지판 바꾸어 놓기, 중요한 편지 빼돌리기,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 선물하기, 5프랑 지폐에 프랑스를 당장 해방하라고 쓰기 등이 그것이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할머니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은 공포심에 질려 옹송그리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에 숨구멍을 만들어주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 아름다운 저항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때 마네크가 한 말이다.

좋은 세상을 보기 원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좋은 세상을 시작해야 한다. 투덜거림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해야 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평화의 표징을 일으켜야 한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기어이 생명의 씨를 뿌리는 연어처럼, 교회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 싹싹한 명랑함으로 이 굳은 세상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 작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력 있는 참 교회는 그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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