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구도 시인 구상 평전 2019년 11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 은총의 세계에 이르다
  -이숭원, <구도 시인 구상 평전>(분도출판사, 2019년)

생각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습관처럼 들춰보는 책들이 있다. 나의 경우 사유의 길이 막힐 때면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글을 읽고, 상상력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면 카프카, 가브리엘 마르께스,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오르한 파묵의 글을 찾아 읽는다. 과잉된 언어에 지칠 때면 시집을 찾아 읽는다. 함석헌의 <수평선 너머>나 구상의 <구상 전집>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구상 시인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다. 더러 찾아볼 수 있는 사진 속의 모습은 그가 학처럼 맑은 선비임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어는 복잡하지 않아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시어를 통해 그는 눈부신 시적 순간을 빚어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인용하곤 하는 그의 시는 대개 후기 시들이었다. 시민 혹은 시인으로서 살아온 그의 삶이 당도한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빚어낸 시들에 주로 공감해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다짜고짜 “이제사 비로소/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이 뜬다”라고 말한 시인이 다음 연에서 한 고백은 삶에 눈 뜬 영성가의 말처럼 들리지 않던가.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덧없어만 보이던 나고 죽은 일조차 “모두가 영원한 한 모습일 뿐”이라니!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런 깨달음에 당도하는 것일까? 신앙인이라면 모두 이런 고백에 이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해가 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드러내며 추한 몰골을 드러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기에 구상의 삶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삶의 곡절이 없었을 리 없건만 그는 어떻게 그런 인식 혹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백석, 김영랑, 서정주, 김종삼 등 한국 시사에 빚나는 인물들에 대한 탁월한 글을 써온 이숭원 교수가 쓴 <구도 시인 구상 평전>은 우리의 그러한 궁금증에 적절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구상 시인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하지만, 그런 인연이 아니라도 구상 시인의 삶은 반드시 톺아보아야 할 도전이었을 것이다. 2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내용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친절하게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덧붙인 저자 연보와 함께 보면 그의 생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했던 시대상과 그의 응답이 오롯이 드러난다.

시대와의 불화
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삶을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은 삶의 외연을 형성하고, 그 시대를 관통하면서 맺어온 다양한 관계들은 삶의 내용을 형성하는 법이다. 구상의 삶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축이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 신앙이다. 그의 부친은 가산이 넉넉한 양반집 출신이지만 가톨릭에 입교하면서 그런 구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교육사업에 뜻을 둔 구상의 부친은 베네딕도 수도회가 함경남도 원산에 수도원을 건립할 때 가산을 정리하여 그곳으로 이주한다. 구상의 가형인 대준은 신부가 되어 그곳에서 헌신했다. 구상도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학에 탐닉하던 그에게 “규범적인 성직자 교육”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그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대학 종교과에 들어갔다. 교수들 대부분이 불교계 승려였기에 그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청답게 그는 시대와 불화했다. 귀국 후 “불온한 사상과 반항적 행동 때문에 경찰의 호출이 잦았고 동원과 징집 등의 위험이 커지자”(45), 지인들은 그를 친일계 신문인 <북선매일신보>의 기자로 천거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친일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공산치하의 이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원산문예총연합회‘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원산문학가동맹이 기획했던 ‘해방기념시집’인 <응향凝香>에 시 세 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응향>은 신랄한 비판에 직면했다. 경직된 이데올로그들은 체제에 복무하지 않는 문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정치 지도부는 인민에게 복무해야 할 문학이 현실도피적이고 퇴폐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데 대해 분명한 비판의 선을 긋고 <응향>에 수록된 작품의 창작 행위를 건국 시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반동 행위로 규정했다.”(61)

이 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그는 탈출을 감행하여 1947년에 서울에 도착했다. 북한에서 탈출해야 했던 그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남한에서 문학적 독자성을 강조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부인신보>, <연합신문>을 거쳐,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북한특보>, <승리일보> 등의 제작에 관여했다. 순수문학이 아닌 체제 선전에 참여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던 그는 1952년부터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 신문을 통해 그는 “독재로 흐르는 조짐을 보이는 정권에 맞서 비판적 논설을 잇따라 발표”(96)했다. 정론직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곤 했다. 필화사건으로 고역을 겪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59년에 소위 조작된 ’레이더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는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 차라리 사형을 내려 달라‘고 외쳤다고 한다“(171).

사상적 전환의 계기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도 그의 시작(詩作)은 중단되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그의 시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인간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했던 것이다. 전쟁 경험을 담은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초토는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을 의미)에서 그는 전쟁의 참상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지속되는 삶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궁핍과 비참 속에서도 삶의 끔찍함을 모르는 듯 해바라기처럼 환하던 아이들의 천진함이 시인의 마음을 저릿하게 흔들었던 것이다. 희망은 이처럼 소박하고 간절하고 천진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의 시어는 관념적이지 않다. 그는 일상어의 재배치를 통해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거룩함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개발독재시대가 열리면서 경제가 삶을 과잉대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영혼은 납작해졌고, 이익에 발밭은 이들은 광포해졌다. 인간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던 시인에게 그 시대는 낯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 것이 ‘까마귀’ 연작이다. “까마귀 소리는 탐욕과 죄악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비판의 육성이자 재앙의 종말을 경고하는 선지자의 외침이었다”(221). 박정희와의 개인적 인연으로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기 어려웠다. 고민과 모색의 시간을 거쳐 그는 사상적 전환의 계기를 맞이한다. 

첫째는 인간 양심의 본질적 요소가 수치심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수치심을 그는 “인간 구제의 가능성“, “모든 규범의 시원”으로 보았던 것이다(178ff). 그는 불안과 허무, 그리고 반항을 주조음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결여한 것이 바로 ‘수치심’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사상을 접한 것이다. 마르셀을 통해 구상은 육화(incarnation)의 개념과 희망의 영속성 개념을 배운다(184). 세계 참여를 통해 희망을 창조하는 것이 실존의 과제임을 자각한 것이다. 

셋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담은 문헌들을 습득함으로써 타종교에 대해 열린 접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187). 바야흐로 성속 불이의 세계관이 정초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인간주의 시의 개화
구상의 초기 시 세계에서부터 단초가 마련되었던 인간주의 시가 만개할 시간이 마침내 당도했다. 이숭원은 한국 시단에서 구상 시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밝힌다. “한국시사에서 구상만큼 인간에 집중한 시인은 거의 없다. 문학의 사명이 삶의 진실을 증언하고 세상의 허위에 맞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구상처럼 철저하게 믿고 그 신념을 실천한 사람도 찾기 어렵다”(235). 그의 시는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 등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그가 지향한 창작의 요체는 “세상에 필요한 시, 표현에 상응하는 등가량의 진실이 담겨 있는 시,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시”(237)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대상에 몰입하여 가장 진실한 모습을 찾아내서 그것을 시로 표현“(277)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확고한 창작 방법론으로 내세웠다. 비유의 과잉과 심상의 탐닉을 경계하며 시를 개인적 차원의 자기표현으로 보는 김춘수식의 문학관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현실에 대한 일차적 반응에 머물러 있는 참여시의 경향도 비판하고, 아무런 회의 없이 자연에 안주하는 박목월식의 체념적 경향도 부정했다.“(278)

이러한 구상의 시 세계는 <그리스도 폴의 강>으로 만개했다. 사람들을 어깨에 짊어진 채 강을 건네주던 성인 ‘크리스토포로스’를 통해 그는 ‘강‘으로 표상되는 고단한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기독교와 불교의 경계가 허물어진 화엄의 세계였고, 만유일체가 은총인 세계였다.

식민시기와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그의 시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풍성해졌다. 삶의 다양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혼돈을 넘어 더 큰 질서를 직관하게 했고, 시작 활동은 그런 깨달음을 보편적 경험으로 바꾸는 창조적 승화의 길이었다.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벗이 되고자 했던 시인, 명리가 아니라 참을 참구했던 시인이 당도한 세계가 은총의 세계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바랐던 것은 당신의 창조물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었다. ‘경탄의 능력‘을 잃어버림이 인간의 가장 큰 소외이다. 고단한 현실을 모르기에 경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생에 대해 경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구상의 삶은 바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한 사례로 우리 가운데 있다. 

한 시인의 생을 가로 세로 샅샅이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인생을 빚었던 다양한 계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준 저자 이숭원 박사의 연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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