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빈센트 반 고흐의 성탄절 2019년 12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빈센트 반 고흐의 성탄절

‘오소서’.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퍼진 간구이다. 어둡고 냉랭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은 ‘오소서’라는 기도 속에 종말론적 희망을 투사한다. 발흥하고 쇠퇴하는 제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날’이 오기를 염원했다. ‘그 날’이 오면 압제자들은 심판을 받고, 힘없는 이들의 억울함이 신원될 거라는 희망은 곤고하고 암담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다. 오시는 분은 승리자여야 했다.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던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을 기다린다고 노래했다. 절절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다림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말 구유에 눕혀지고, 박해를 피해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예수는 승리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시는 분은 가장 취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신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교회마다 성탄 장식을 화려하게 하고, 성탄절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지만 정작 예수는 외롭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이반이 들려주는 ‘대심문관’ 이야기가 떠오른다. 예수가 재림하여 나타나자 대심문관은 그를 잡아 지하 감옥에 가둔다. 한 밤중에 그는 감옥으로 예수를 찾아와 ‘당신은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라 빵을 원하고, 담담하고 한적한 평화보다는 신비를 원하고, 평화로운 공존보다는 권력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사람들의 자유를 담보로 잡은 대가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있는데 당신의 등장으로 그런 질서가 교란될 수도 있다며 떠날 것을 종용한다. 예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곳을 떠난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가장 취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역사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벗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의 민낯을 폭로하면서 사랑과 우정에 근거한 새로운 세상의 꿈을 파종했던 그 예수는 어쩌면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자신들의 권력욕을 믿음으로 포장하는 이들에게 의해 이용당하고, 심지어 납치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떤 예수를 기다리고 있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을 목회자적 심정으로 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어느 날 임신 중에 남자에게 버림받은 채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겨울 거리를 떠돌고 있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고흐는 병들고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고흐는 좁고 남루한 자기 집으로 그 여인을 맞아들였다. 거리생활에 이골이 나 까칠한 그 여인과의 공동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빈센트는 가난했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빈센트의 그런 행동을 품위 없는 것으로 여겨 비난했다. 그러나 빈센트는 “버림받은 여인을 모른 척 하며 내버려두는 것과 거두어 돌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품위 있고, 사려 깊고 남자다운 행동인지”를 되물었다.

시엔이 해산할 날이 다가오자 빈센트는 그를 산부인과로 인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엔의 옆에 누워있는 작은 생명을 보면서 그는 깊은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연약한 아기와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그가 그렇게도 흠모했던 렘브란트의 성탄절 그림이 현실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들 모자는 어둔 밤에 홀로 환히 빛나는 빛이었고, 절망을 넘어서는 충만한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빈센트는 슬픔의 황야에서 길을 잃은 채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살던 시엔의 품이 되어 주었고, 그 결과 성탄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쓰리고 아픈 이들의 품이 되어주려는 이들을 통해서 오신다.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 냉기가 감도는 쪽방에서 몸을 곱송그린 채 잠을 청하는 사람들,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고 있는 사람들, 높은 철탑 위에 올라가서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세상 어디선가 지금 울고 있는 사람,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우는 것”이라 노래했다. 그 울음에 반응할 때 우리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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