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세례’ 2019년 12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세례>, 
1440년경, 목판에 템페라, 167x116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o, 1416-1492)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작품 생활 초기에는 피렌체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활동을 했다기보다는 화가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혁업자로 구두 공장을 운영했기에 집안은 무척 부유했고, 아버지의 교육열 또한 높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교양인으로 키우기 위해 당대의 교양언어인 라틴어 수업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중세의 화가들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다소 낯선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는 참 위대한 화가입니다.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가인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피에로의 그림 ‘그리스도의 수난’을 처음 본 후에 느낀 것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견고한 구성과 차분한 정취의 조합과 광휘와 신령함에 대한 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 작품은 아름다움과 신비의 조합이며 무언가 명백히 드러내면서도 모두 드러내지는 않는다(페르메이르, 조르조네)는 생각이 잠시 밀려들었던 것이다”(<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p.231.) 줄리언 반스는 그 그림을 자기만의 ‘톱 10’ 명화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말만으로는 그의 그림이 어떠한지 알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그에 대해 말해볼까요? 피에로가 피렌체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르네상스의 거장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이는 당시 예술 이론의 대가였던 알베르티였습니다. 그를 통해 피에로는 원근법의 원칙을 배웠다고 합니다. 피에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원근법이 가장 정교하게 적용된 그림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균형 잡힌 구성, 단순화된 형태, 부드러운 색채를 통해 그는 경건한 분위기를 창조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려는 그림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 복음서가 그린 두 분의 관계는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말에서 드러나듯 상당히 일방적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역할에만 국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경쟁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공관복음서들은 다 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마가복음은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막1:9)고 간결하게 언급합니다. 누가복음은 그보다 더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조금 다른 과정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당신 앞에 나온 예수님을 보고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말하며 만류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마3:14, 15)라고 응답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영적으로 우위에 있어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뜻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쟁하던 시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마태는 이런 언급을 통해 예수님의 우위를 드러내려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여섯 명입니다. 이 말은 몇 사람이 유심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기둥처럼 서있는 나무 오른쪽에 서 계시고, 그 옆에는 옷을 벗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옷을 벗는 사람 뒤편 멀리 화려한 옷을 입고 큰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몇 보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일 겁니다. 나무 왼쪽에는 세 천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천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살피고 있는데, 다른 한 천사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시선은 감상자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그 시선을 통해 우리를 그림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 뒤에 살짝 몸을 숨기고 있는 천사의 몸짓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다른 천사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천사의 손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뭔가 확신을 주기 위한 몸짓일까요? 이 세 천사는 정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에 슬쩍 유머와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원경으로 보이는 풍경은 요단강 주변이 아니라 피에로의 고향인 토스카나 지방입니다. 피에로는 그 놀라운 순간을 현재화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산야는 가파르거나 척박하지 않습니다. 목가적이고 평화롭게 보입니다. 화면 하단 좌우편에 배치된 식물들도 토스카나 지방에서 자라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옅푸른 하늘빛, 그리고 마치 UFO처럼 보이는 구름도 일상적 삶의 편린처럼 보입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우뚝 서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체와 나무 기둥줄기는 대리석처럼 흰 빛을 띠고 있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 순간에 신적 고요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그릇에 든 물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민망함과 당혹감이 스며 있습니다. 그의 왼손은 긴장되어 보이고, 뒤로 가볍게 들어 올려진 왼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둥처럼 우뚝 서서 장면을 분할하고 있는 나무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가지를 뻗은 채 큰 아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상단이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원래 산세폴크로(Sansepolcro) 예배당에 있는 제단화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무성한 그 나뭇잎은 일종의 아치가 되어 예수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뭇잎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늘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나무 아래 날개를 넓게 펼친 비둘기가 보입니다. 비둘기는 물론 성령의 표상입니다. 날개를 펼친 비둘기와 물그릇, 예수님의 수염, 가지런히 모은 두 손, 그리고 배꼽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수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에로는 왜 굳이 옷을 벗고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배치한 것일까요? 그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감상자들은 비로소 그의 뒷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일종의 창문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주현절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소리를 지금 듣고 싶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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