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 2020년 05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벧전2:16)

그리스도의 평강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시기를 빕니다.

바람을 타고 아까시 꽃향기가 날아오면 그 흐뭇하고 상큼한 향에 취해 기분마저 환해지는 계절입니다. 하얀 십자가 모양으로 피어난 산딸나무 꽃도 5월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막 모내기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묘판에서 정겹게 자라던 어린 모들이 무논에 심겨진 채 하늘거리는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이제는 세찬 바람도 견디며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투해야 할 겁니다. 가만 두어도 잘 자라겠지만 괜히 안쓰러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설사 식물이라 해도 산다는 것은 엄중한 과제임을 알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건너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안간힘을 써봐도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아 눈물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시지요? 당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는 분들도 계시지요? 일거에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저 잘 견디시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군요. 하종오 시인의 ‘참나무가 대나무에게‘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네가 꼿꼿이 서서 흔들리는 땅에/나는 바람 잠재우며 버틴다./너는 휘어지지 않고 휘어지지 않고 꺾여서 바치고/나는 쪼개져 쪼개져 불로 타서 바치는/우리 목숨 더 깊은 목숨 어느 나무가 바치겠는가.” 참나무의 길이 있고 대나무의 길이 따로 있지만 그 나무들은 서로에게 엉키며 뿌리 뻗어서 서로를 세워줍니다. 때가 되면 자기 몸을 기꺼이 바쳐 더 큰 세상을 이룹니다.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겁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다르지만 함께 어깨를 겯고 슬픔의 세월을 이겨내는 동시에, 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것,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겁니다.

돌아오는 주일(2020/05/24)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회심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나 요한 칼뱅에 비해 덜 알려진 분이긴 하지만 감리교인들이 늘 존숭의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인물입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에 자기 삶의 대원칙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행동 원칙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며, 이 목적에 맞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것, 그것이 나의 원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단순히 교회에 적을 둔 교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삶의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구한다는 말일 겁니다. 그는 그런 삶이 주는 유익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계산하는 마음은 이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라면 그는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당시의 영국 교회는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교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교회가 그를 내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웨슬리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복음을 즐겨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바른 일이며, 또 나의 고귀한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739/03/28, 편지) 

그는 교회 밖에 머물고 있는 이들의 삶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광부들과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이 사는 삶의 자리에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실현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동역자들과 함께 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초기 감리교인들은 사회를 성화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여겼습니다. 교회 성장이라는 원죄에 사로잡힌 한국 감리교회는 이 소중한 과제 혹은 유산을 내다버렸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사회적 성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지혜와 뜻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가래라는 농기구를 아시는지요? 삽처럼 생긴 기구인데 가랫날 양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은 후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한 사람은 가래손잡이를 붙들고 힘과 방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흙을 파거나 옮길 때 가래를 사용하면 일의 능률이 커졌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래질을 하는 어른들의 몸놀림에 매혹되곤 했습니다. 셋이서 마치 한 몸인 듯 움직이는 그 리드미컬한 동작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내는 입소리가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둠의 세월을 건너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젊은 시절에 불렀던 노래도 떠오릅니다.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 둘의 소리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함성 될 때 저 어리석은 자 깨우칠 수 있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 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힘이 될 때 저 굳센 장벽을 깨뜨릴 수 있네
혼자 사랑으로 할 수 없겠네 둘의 사랑으로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세상 하나 될 때 저 억눌린 사람 참 자유 얻겠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외로움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내 곁에 든든한 신앙의 벗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거짓되고 비열한 세상과 맞설 수 있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자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포악한 말들이나 부정의에 항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허물도 큽니다. 그러나 허물이나 부족한 부분에만 눈길을 주면 우리 속에서 사랑이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들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호명하는 이들이 공동체의 보화입니다.

이제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이 머지않습니다.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반가운 표정을 짓고 싶습니다. 목소리도 조금 더 높여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사실을 피차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한껏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아프지 마십시오. 우울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가지 사이를 오가며 흥겹게 노래 부르는 새들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의 운명이 되는 법입니다. 한 주간 내내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 위에 머무시기를 빕니다.

2020년 5월 23일
김기석 목사 드림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