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희망의 불씨를 지키는 사람들 2020년 05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희망의 불씨를 지키는 사람들

“제단 위의 불은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장작을 지피고, 거기에 번제물을 벌여 놓고, 그 위에다 화목제물의 기름기를 불살라야 한다.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레6:12-13)

주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지난주에 편지를 쓰면서 이제 목회서신 쓰는 일을 그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또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 사태가 잦아들 줄 모릅니다. 좋은 소식 오기만을 학수고대했건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현장예배를 재개한 교회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조금 더 시간을 갖고 대처해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칫 방심하는 사이에 우리가 감염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고민이 깊었습니다만 기획위원들 전원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결정을 그렇게 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쓸쓸함이 깊어가는 것은 왜일까요?

어제는 하루 종일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의 옛 노래 ‘타향살이’가 입 끝에 맴돌았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이 격절의 시간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의 비애로 다가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을 걷기만 하면 이 노래가 자꾸 찾아왔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한 시라면 백석의 시도 있고 정지용의 시도 있고 이용악의 시도 있건만 왜 이 노래가 제 정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와 나를 온통 뒤흔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타향살이 하는 것 같은 막막함과 쓸쓸함 때문일 겁니다.

늘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함께 만나 성경 공부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음식을 나누고, 성찬에 참여하고, 차담을 나누었던 이 시간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마치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는 그래도 더러 찾아와 주는 이도 있고, 책이라는 벗도 있고, 아침저녁으로 산책도 하니 덜 쓸쓸합니다만,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과 연세 드신 교우님들은 이 시간이 더욱 힘들 것 같습니다.

예배당에 오지 못한다고 하여 경건생활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큰 정성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앞에 적은 레위기 말씀 중에 “제단의 불은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는 구절에 자꾸 마음이 갑니다. 마음의 불을 잘 간직하고 계신지요? 그 불을 지키는 것이 제사장 직무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마카베오 하권에는 이 불과 관련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로 끌려갈 때, 당시의 경건한 사제들이 몰래 제단의 불을 가져다가 물 없는 저수 동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놓고, 아무도 그곳을 알아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이 되자 느헤미야는 그 불을 감추어 둔 사제들의 후손들에게 그 불을 가져오라고 일렀습니다. 사제들이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불이 있던 자리에 짙은 색 액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느헤미야는 그 물을 떠오라 지시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칠 준비가 되자, 느헤미야는 사제들에게 나무와 그 위에 놓인 것에 그 액체를 뿌리라 했습니다. 그 액체를 뿌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서 구름에 가렸던 해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제단에는 큰 불이 일었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박해의 시기에도 그 불은 변형된 모습으로라도 간직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불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주위 사람들을 세심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던 요셉은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곁에 머물고, 그들이 홀로가 아님을 상기시키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상황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래는 2003년 8월 17일 설교 중에 들려드린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전 영국 북부의 탄광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탄광은 안전시설이 매우 미비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광부들이 믿을 것이라곤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강철같은 근육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날 갱도가 무너져서 12명의 광부가 굴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일하고 있던 곳은 갱도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석탄의 분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광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조용히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소리가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일순 절망감이 몰려왔습니다. ‘구조자들이 때맞추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기다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통로를 개척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면 가뜩이나 부족한 산소를 급격히 소비하게 될 것이라며 그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계시원”(time keeper)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광부들의 작업 시간과 산소량을 체크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계시원이 대답했습니다. “사고 나기 직전이 10시 30분이었어. 우리는 모두 12명이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대략 2시간 분량의 산소가 남아 있어. 아마 별일 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맑고 확고하고 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갱도의 저편에서 들려올 기계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따금 누군가가 “몇 시지?” 하고 물을 때마다 계시원은 성냥불을 켜서 시계를 확인하고는 “십오 분이 지났어”, “이제 겨우 10분 지났다구” 하며 대꾸했습니다. 묻고 대답하는 인터벌이 점점 길어졌고, 모두가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무도 잠들지는 않았습니다. 산소가 거의 떨어져 간다고 생각할 즈음 바위틈으로 달콤한 곡괭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시간을 묻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이 거의 지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신선한 공기가 갱도를 통해 밀려들어오고, 랜턴 불빛이 비쳐들면서 그들은 구조되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일부러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의 음성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광부들과 아내, 친척들과 눈물범벅이 되어 뒤엉켰습니다. 12명 중 희생된 것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시원이었습니다. 마을의 목사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을 때, 광부들의 안도의 눈물은 슬픔과 경악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계시원만 죽었단 말입니까? 목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여섯 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시원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을 때 그들은 계시원의 시계가 사고 당시인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계시원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면서도, 동료들을 비추어 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소진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편지가 장황해졌습니다. 타임 키퍼와 같은 이들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너무 조바심하지 마십시오. 느긋하게 이 상황을 견디십시오.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한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가까운 곳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친절한 미소와 따뜻한 미소를 보내십시오. 주님이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심을 알아차리십시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며 기뻐하십시오. 교우 여러분의 한 주간의 삶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5월 30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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