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2020년 08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해마다 여름이면 열리는 독서캠프가 있다. 부산, 김해, 포항, 마산, 창원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주축이지만, 캠프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참여자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꽤 여러 해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터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부름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름하여 ‘이야기 손님’이다. 새로 발간한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부탁받지만 그 캠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더 이상 손님으로 처신하기 어렵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소란 속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대개 잘 아는 사이지만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다. 자기 삶의 지향이나 태도를 담은 닉네임으로 불릴 때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새삼스럽게 재확인하곤 한다. 하루 한 편 이상 시를 외워야 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함께 부르고, 모두를 하나로 불러주신 분께 기도를 올린다.

순서와 순서 사이에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곳에 세워진 커피 트럭에 몰려들어 커피를 나누고, 달빛이 교교히 비치면 뭔가에 이끌리듯 춤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짐벙진 춤판이 벌어진다. 우아한 춤사위에 매료된 탓일 것이다. 어느덧 강고한 자아는 스러지고 하나됨의 기쁨이 사람들 사이를 가득 채운다. 적대감이 가득한 세상에 사느라 지쳤던 이들이기에 그 따뜻한 환대의 공간에 머물며 치유를 경험하는 것 같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제주도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서캠프가 취소되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사정이 그러니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려고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할 수 있는 작은 북토크 모임이 한번 열렸다. 꽤 많은 분들이 참여했고, 뒤늦게 참여를 신청한 분들은 부득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참여자 가운데 한 분은 다양한 종류의 허브 오일을 만들어와 지인들과 나누었고, 자기 밭에서 수확한 마늘종으로 만든 장아찌를 가져와 벗들에게 건넨 분도 있었다. 물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섬김이었다. 대체 이분들은 어떤 그리움 때문에 이렇게 모이는 것일까?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역사의 부정성이 소멸된 장소에 대한 꿈은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의 꿈이었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는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고립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화한다. 구별짓기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고립과 고독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 영혼의 회복력을 빼앗아간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공간으로서의 장소이든 사람들이 맺는 관계이든 상관없다. 미셸 푸코는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그곳은 어떤 권력 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이다. 위에서 아래로 계열화된 질서가 아니라, 마치 잔뿌리들이 한데 어울린 평등한 생태계이다. 사람들을 가르던 온갖 장벽이 무너지고, 낯선 이들이 우애를 나누며 일체를 경험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연결되어 생명과 평화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 말이다.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천국을 시작해야 한다. 신앙이란 고립을 넘어 연대하려는 용기 아니던가.
(국민일보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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