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불확실한’ 사계 2021년 10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불확실한 ‘사계’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음악의 치유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무겁고 답답할 때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을 반복하여 듣는다. 그 고요한 선율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노라면 어느새 고적한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불평이 슬그머니 솟아나올 때면 바흐의 칸타타 ‘나는 만족합니다’(Ich habe genug)를 듣는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듣는 동안 내 마음에 짙게 드리웠던 어둠은 서서히 스러지고 삶에 대한 감사가 떠오른다. 음악은 우리가 일상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다. 현실이라는 중력에 붙들려 사는 이들을 잠시나마 자유롭게 해준다.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는 클래식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곡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풍경을 머리에 그리며 듣노라면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게 마련이다. 즐거운 새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나뭇잎이 수런대는 소리, 쏟아지는 소나기, 번개와 뇌성, 사람들이 흥청대며 추수의 기쁨을 노래하는 풍경, 느닷없이 찾아오는 고요함, 차가운 바람 소리, 얼음 위를 걷는 사람들, 난롯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계절의 순환은 삶의 풍경을 다채롭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계의 질서가 교란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조화롭던 계절의 순환이 무너지면서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재해가 빈발하고 있다. 기후 변화 문제는 지구촌이 직면한 중대하고도 전면적인 위기이다. 경고의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일에 온통 몰두할 뿐이다. 타이타닉호가 빙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인류는 지금 몰락의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학자들이 위기의 징후로 제시하는 통계 수치나 그래프, 그들이 생산해내는 위기 담론은 경청되지 않고 있다.

엊그제 뮤직앤아트컴퍼니가 주관한 ‘사계 2050’ 연주회에 다녀왔다. 2050년 서울의 예상 기후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이 알고리즘을 생성하여 편곡한 곡이 무대에 올려졌다. 비발디가 작곡한 원곡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그 흐름은 확연히 달랐다. 기괴하고 음산하고 심란했다. 화성은 뒤틀려 불안감을 자아냈고, 지역의 생물종 멸종 위험을 나타내기 위해 제거된 음들 때문에 음악의 연속성이 무너졌다. 강수량의 감소 가능성에 따라 악장의 음악 속도가 느려져 어둡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단속적으로 끼어드는 타악기 소리가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연주 내내 첼로와 피아노 연주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서 연주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안절부절 못해 서성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장소와 풍토는 정서의 원료인 동시에 뿌리이다. 극 지방에 사는 사람과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의 정서가 같을 수 없다.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과 농어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의 정서 또한 다르다. 계절에 대한 감각이 달라질 때 혹은 기후와 맺는 삶의 방식이 달라질 때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음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계 2050’은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세상에 대한 음악적 예언인 동시에, 좋았던 시절을 반추하는 일종의 애가처럼 들렸다.

정부는 2050년까지 국내탄소순배출량을 ‘ㅇ’으로 줄이고,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18년에 견줘 40%로 낮추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많은 이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목표는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 때문에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논의 또한 활발하다. 시간이 촉박하다. 우리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선뜻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하지는 않는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동시에 작동된다. 어떤 이들은 문제의 크기에 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인류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전문가들이 결국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결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옳기에 해야 하는 일 말이다. ‘사계 2050’의 곡명은 ‘(불확실한) 사계’이고, 작곡자는 ‘인류’였다. 인류는 이제 새로운 곡을 짓기 시작해야 한다.

(2021/10/23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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