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다리 놓는 사람들 2025년 02월 19일
작성자 김기석
다리 놓는 사람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사형!
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

불교 승려였다가 환속한 시인 김달진의 『山居日記』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잔혹한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과 거기 매달린 예수가 보인 숭고한 모습은 인간 존재의 양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잔인함과 숭고함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마음은 늘 위태롭다.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인간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말이다. '이상한'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데이논deinon은 이상하다는 뜻 외에도 '무서운', '경이로운' 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집과 같은, 즉 관습적이고 일상적이고 안전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사태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일상적인 세계, 상식의 세계, 예측 가능한 세계가 무너질 때 삶은 혼돈으로 변한다.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며 냉소와 조롱을 보내는 사람들과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예수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종교도 때로는 우쭐거림, 분열, 냉소, 혐오와 적대감의 숙주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어두운 운명을 예고한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1) 거룩한 것(the sacred)이 타락하면 마성적인 것(the demonic)으로 변한다. 자기 확신이라는 폐쇄 회로에 갇힌 이들은 타자를 대화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비진리’ 혹은 ‘거짓’일 뿐이다.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진리를 지키려는 싸움에 나선 이들의 의무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일은 이렇게 발생한다. 예수는 유대교 권위자들이 세운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벽, 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담을 온몸으로 허무셨다. 폭력적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과 존중과 온유함으로. 어둠은 빛을 미워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둠은 빛의 부재라 했지만 빛의 부정이라 말해도 무방하다. 빛의 부정, 바로 그것이 십자가 처형이다. 

효율성과 편의성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철저한 실패이다. 예수의 꿈은 십자가 위에서 좌절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절망의 자리를 희망의 못자리로 만드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은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느라 갈라진 인류를 수신인으로 하는 하늘의 편지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모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증오를 온몸으로 껴안아 녹이는 포월의 사랑, 조각난 세상에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섬세한 배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무제약적인 사랑에 자기를 맡기는 신뢰심, 세상의 모든 설움과 고통을 당신의 온몸으로 짊어지는 희생과 헌신, 소명을 다 이룬 이의 홀가분한 자유. 십자가는 일상의 분잡 속에서 복닥거리는 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토머스 머튼은 “지옥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서로를 떠날 수도 없으며 그들로부터 떠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러한 것이라면 지금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지옥 아닌가? 정현종 선생의 시 ‘섬’은 외로움에 처한 이들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바람을 간결하게 노래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얼마나 간절한가? ‘싶다’라는 연결 어미는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지되는 거리감을 반영한다. 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이어주는 것이 곧 십자가의 은혜이다. 
 
아주 오래 전 영국 북부의 탄광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 탄광은 안전시설이 미비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곤 했다. 광부들이 믿을 것이라곤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강철 같은 근육뿐이었다. 어느 날 갱도가 무너져서 12명의 광부들이 굴속에 갇혔다. 그들이 일하던 곳은 갱도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석탄의 분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광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순 절망감이 몰려왔다. ‘구조대가 때맞추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통로를 개척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가뜩이나 부족한 산소를 급격히 소비하게 될 것이라며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계시원”(time keeper)을 불러 자기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광부들의 작업 시간과 산소량을 체크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계시원이 대답했다. “사고 나기 직전이 10시 30분이었어. 우리는 모두 12명이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대략 2시간 분량의 산소가 남아 있어. 아마 별 일 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맑고 확고하고 강했다.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갱도의 저편에서 들려올 기계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누군가가 “몇 시지?” 하고 물을 때마다 계시원은 성냥불을 켜서 시계를 확인하고는 “십 오분이 지났어”, “이제 겨우 10분 지났다구” 하며 대꾸했다. 묻고 대답하는 인터벌이 점점 길어졌고, 모두가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무도 잠들지는 않았다. 산소가 거의 떨어져간다고 생각할 즈음 바위틈으로 달콤한 곡괭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아무도 시간을 묻지 않았다. 두 시간이 거의 지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신선한 공기가 갱도를 통해 밀려들어오고, 랜턴 불빛이 비쳐들면서 그들은 구조되었다. 그들 중 몇몇은 일부러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의 음성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광부들과 아내, 친척들과 눈물범벅이 되어 뒤엉켰다. 12명 중 희생된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계시원이었다. 마을의 목사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을 때, 광부들의 안도의 눈물은 슬픔과 경악으로 변했다. 왜 계시원만 죽었단 말인가? 목사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여섯 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시원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을 때 그들은 계시원의 시계가 사고 당시인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았다. 계시원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면서도, 동료들을 비추어 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소진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계시원을 통해 자비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막 같은 세상이지만 스스로 우물이 된 이런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기후 위기가 심화되고, 국론 분열이 급기야 정치적 과격주의로 급진화되고 있는 이 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대림절을 맞이한다. 대제사장 혹은 교황을 가리키는 단어 폰티프(Pontiff)는 본래 로마의 대신관을 가리키는 pontifex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폰티펙스는 ‘다리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다리 놓는 이들의 소명이다. 그 다리의 이름이 십자가가 아닐까?

(* 가톨릭 잡지 <생활성서> 2025년 3월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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