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레이첼 헬드 에반스에게 | 2025년 03월 0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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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기석 | |||||||
레이첼 헬드 에반스 님, 제가 작가님을 이렇게 풀 네임으로 부르는 것은 <온 마음 다하여>를 읽은 후 나를 사로잡은 경외심 때문입니다. 37년이라는 짧은 여행을 마치고 떠나신 당신의 삶을 나는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기신 글을 통해 나는 비록 희미할망정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시인 천상병 님의 시 ‘귀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예기치 않은 시간에 삶의 여정을 마쳐야 했지만 주어진 생을 한껏 살아냈기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여겨집니다. 살아온 삶의 내력은 다르지만 우리는 존재의 토대이신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나는 작가님보다 오래 살았지만 진리의 언덕을 허위단심으로 오르다가 마침내 당도한 인식의 자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묘한 동지의식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미국 남부의 복음주의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당신은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주는 ‘최우수 기독교인 상’을 갈망하는 열정적인 소녀였습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종교적 과잉 성취자라 일컫더군요. 하지만 어린 시절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켜켜이 쌓인 모순에 대한 질문이 생기는 순간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확실하던 것이 불확실하게 변하고, 안다고 생각하던 것이 무지의 구름에 뒤덮일 때 사람은 누구나 당혹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도 어김없이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에 당신을 지켜준 것은 불완전한 믿음을 떠받쳐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보다 큰 신앙의 가족 안에서 나의 자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일”(31)이라는 당신의 고백은 적실합니다. ‘큰 신앙의 가족’은 당신이 속했던 공동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일을 했던 성경의 인물들, 특히 여인들이야말로 당신의 진실한 가족입니다. 삶을 더 큰 서사의 일부로 이해할 때 그 이야기는 무의미의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회의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 기독교인들 속에서 당신이 느꼈던 답답함을 저 또한 절감한 바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한 이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조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면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하곤 했습니다. ‘시험 들었구나!’ 인식의 장벽 혹은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이에게 건넬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 시인 김승희도 이런 경험을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라는 시에서 그는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라고 고백합니다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철옹성처럼 보여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거푸집에 불과합니다. 지나고 보니 당신이 하신 말씀이 옳음을 알겠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나 그들의 성경 해석, 그들의 교회, 그들의 하나님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문제였다.”(67)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름을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로 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또한 인식의 장벽에 부딪혔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는 하나님 경험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습니다. “봄날의 산들바람을 어떻게 상자에 담을 수 있으며, 반딧불이의 반짝임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단 말인가?”(89) 하나님 체험은 이야기를 통해 어렴풋이 드러낼 수는 있지만 개념을 통해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는 타자들과 소통하고 배우려는 태도인 개방성과 연결됩니다. 자폐적인 확신의 덫에 빠지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 속에 갇힌 채 그것을 확신이라는 외피로 단단히 감쌉니다. 그 단단한 외피는 타자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완강한 결심을 보여주지만 결국 자기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에서 해방되기’라는 장에서 진리는 엿보고, 탐험하고, 발견하는 것이라면서 “확실성은 믿음이 아니다”(95)라고 말합니다. 이 서슬 퍼런 선언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신학이나 교회 전통에 대한 결연한 저항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태도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이세벨이니, 귀신 들린 여자니, 사탄의 무리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협박 메일을 받을 때도 많았습니다. 비난의 채찍을 무덤덤하게 웃어넘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확신의 외피를 걸친 이들은 폭력적인 언사와 표정과 행동으로 자기들이 구축한 세계를 뒤흔드는 이들을 위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호인을 자처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변호를 받아야 할 만큼 허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비난을 자주 받다보면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면의 분열을 요구하는 교회를 떠나거나 냉소주의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내가 세례를 받은 교회나 지금 내가 속한 교회만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를 공유하는 보편적 교회—는 2천 년에 걸쳐 지구상의 모든 대륙과 문화 속에서 서로를 대신해 사랑하고 기도하고 믿는 사람들로 연결된 전체 네트워크다.”(156) 이 근원적 확신이 당신을 지켜주었습니다. 고래 무리는 상처 입은 동료를 등으로 떠받쳐 주어 숨을 쉴 수 있게 해준다지요? 전통의 아름다움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비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신이 한 일이 제게는 놀라움이었습니다. 비난 메일을 종이로 출력하여 그것을 잘 접어 각종 동물 형태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하셨나요? 상처의 기억과 잘 헤어지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 생의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녀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기억들을 그렇게 능동적으로 대면하는 순간 그 기억들의 쏘는 힘은 약화되게 마련입니다. 나무는 꺾이거나 벌레 먹어 상처를 입은 자리를 치유하기 위해 수액을 낸다고 합니다. 그 수액이 뭉친 것이 혹처럼 보이는 옹두리입니다. 가끔 숲을 거닐며 그 옹두리에 눈길을 주며 나무에게 소곤소곤 말을 건넵니다. ‘참 애썼다, 장하다, 고맙다’. 그럴 때면 자연과 내가 내통하는 것 같은 은밀한 기쁨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당신은 한때 세상이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 잘 듣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세상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시인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방향전환의 능력을 어떻게 익히셨나요? 유머가 응집된 긴장감을 일시에 해소시키듯 생각의 전환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을 열어 보여줍니다. 익숙한 세계에서 잠시만 벗어나도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해소됩니다. 과거에 교회는 ‘어머니와 교사’를 자처했습니다. 늘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더 큰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도움을 구합니다. 가르치거나 고쳐주려는 태도를 내려놓을 때 우리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주변부가 가장 풍요로운 장소일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주변부 혹은 변방은 낯선 세계와 이어져 있고, 낯선 세계의 개시는 더 커지라는 부름입니다. “협박 메일을 종이접기로 바꾸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는 이 세상을 함께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상처 입는다. 그리고 함께 치유하도록, 함께 용서하도록, 함께 창조하도록 부름 받는다.”(229) 우리를 심연 쪽으로 잡아당기는 어두운 기억을 오히려 타자와 만나기 위한 촉수로 바꾸는 그 눈부신 전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어둔 그늘을 흰 그늘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용기입니다. 당신은 인간의 텔로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낌없이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0세기에 양차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철회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과 메타 버스 등으로 인해 인간의 능력이 확장된 지금, 세상은 안녕한 것일까요?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트랜스 휴머니즘이니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포스트 트루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적 공간에서 떠도는 어떤 말도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일 겁니다. 위험한 세상입니다. 도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자고 우리를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주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 당신이 바로 그 예입니다. 당신이 넘어진 그 자리를 딛고 일어나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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