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장미를 심는 마음 | 2026년 09월 0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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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기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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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심는 마음 거대한 수마가 네팔 북부 히말라야 산간 마을들 을 집어삼켰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정겨운 웃음소리가 들리던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흙더미에 파묻혔고, 어제까지 인사를 나누던 이웃들이 거센 물살 속으로 사라졌다. 무너지지 않은 건물 지붕 위에서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이들과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뒤섞인 화면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계곡을 타고 쏟아지는 토석류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이들의 모습은 먼 나라의 남의 일이 아니었다. 기후위기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앞에 펼쳐놓을 묵시록의 예고편이었다. 이제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쪽에서는 이미 늦었다며 우울에 빠져 무기력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과학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막연히 기대한다. 이 두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변화를 되돌릴 수 없다 해서 앞으로 닥칠 재난의 크기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다. 폭염과 가뭄, 산불과 홍수, 감염병은 몇 년에 한 번 오는 이변이 아니라 해마다 갱신되는 일상이 되었다. 흐름을 일거에 되돌릴 수는 없다 해도 그 파괴의 속도를 어떻게 줄이느냐가 우리의 과제이다. 뭘 해야 할까? 유럽에 파시즘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36년, 조지 오웰은 영국 월링턴의 작은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장미를 심었다. 세상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장미를 심는 일은 얼마나 무용해 보이는가. 그러나 획일적인 파괴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삶의 기쁨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을 지키는 존엄한 저항이 아닌가.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세상이 아직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선언이자, 재앙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거부다. 하지만 개별적 실천만으로 무너지는 세계를 지켜낼 수는 없다.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예언자 예레미야는 포로민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곧 해방되어 돌아갈 것이라는 기만적인 희망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오히려 그 땅에서 집을 짓고 동산을 가꾸며 열매를 먹으라 했다. 결혼하여 삶을 이어가고, 자신들을 사로잡아간 도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했다.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현재를 유예하지 말고, 낯선 절망의 땅에서 공동체의 삶과 미래를 다시 세우라는 요구였다. 포기하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삶의 터전을 일구는 것, 그것이 예레미야가 가르친 급진적 희망이었다. 기후위기의 현실에서 체념에 빠지지 않는 첫걸음은 나의 일상이 생태계 파괴에 공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성찰이다. 그러나 개인의 윤리적 결단만으로 기후위기라는 구조적 재난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성찰은 두 방향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는 국가와 기업이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이다. 다른 하나는 폭염과 홍수에 먼저 노출되는 이웃의 곁을 지키며,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기후 참사를 기억하고 담론의 지평 속으로 끌어들이는 검질긴 노력이다. 기억하는 사람은 무관심할 수 없고, 말은 누군가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킨다. 개인의 선택이 서로 연결되어 공동체의 요구가 될 때 비로소 정치와 제도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된다. 실천은 재난을 단번에 멈추는 마법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손잡은 작은 선택들이 다음 재난의 크기를 줄인다.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그들의 안부를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보잘것없다. 그럼에도 절망의 깊이를 똑바로 바라본 사람만이 다시 흙을 파헤치고 장미를 심는다. 가능성이 커서 품는 희망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마음. 헛된 기대를 내려놓고 주어진 현실 위에서 오늘의 삶을 굳건히 일구어내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파국을 조금이라도 늦추어가며, 무너지기 쉬운 미래를 향해 내미는 연대의 악수가 될 것이다. (* 2026/09/04일자 경향신문 컬럼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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