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39-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하여 2015년 09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해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에게 불쑥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목회자로 살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부탁으로 앞으로 출간될 선생님의 책 원고를 읽고 몇 마디 추천의 글을 쓰게 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습니다. 내가 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한 어머니라는 사실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토드가 스물 한 번째 생일이 지난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죽임을 당했다지요? 선생님은 그 순간을 "나의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졌다"고 쓰셨습니다. 벌써 33년 전 일이니 세월이 꽤 흘렀네요.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그 순간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겁니다. 선생님이 그나마 그 비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울고 계신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월터 부르그만 교수가 탄식시를 써볼 것도 제안하셨다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라헬이 되어 탄식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나를 찾으소서!/나는 지금 슬픔의 계곡에서 길을 잃어/나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나를 찾으소서!/이 계곡으로 오셔서 나를 찾으소서!/이 통곡의 땅에서 나를 꺼내주소서."

"주님은 나의 깨진 마음 속에/당신의 집을 지으실 수 없습니까?/주님,/내 울부짖음을 듣고 계시다는 기색이라도 하소서!"

"주님,/세상의 빛깔이 모두 사라졌습니다!/음악소리가 모두 꺼졌습니다!/남아 있는 푸른빛을/침묵의 수의가 모두 덮어버렸습니다./사방이 잿빛이고/죽음의 냄새가 진동합니다."

"내가 얼마나 못된 죄를 지었길래/주님은 나를/빛도 없고/온기도 없고/희망도 없는/이 수렁에 빠뜨리셨습니까?"


가슴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그 비탄의 신음을 받아 적듯 적은 시편들이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어떻게 그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들어올리실 수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탄식시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한 오롯한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 가멸찬 은혜에 대한 갈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탄식하면서도 동시에 주님 없이는 그 아픔 속을 걸을 수 없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탄식시를 읽으며 자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사고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 특히 작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로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라헬입니다.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따라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야곱의 아내 라헬은 벧엘과 에브랏 사이 어딘가에서 산고를 겪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음이 다가옴을 보면서 라헬은 막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젖 한 번 물리지 못하고 핏덩어리 자식과 헤어져야만 하는 어머니의 비통함이 그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불길하게 여긴 야곱은 그 이름 대신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으로 불렀지요. 자식에게 밝은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겠습니다만 베냐민은 또한 베노니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헬은 길에서 죽었고 베들레헴에 가까운 에브랏 근처에 묻혔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빌어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렘31:15) 하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라헬이 울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헬의 통곡은 또한 헤롯에 의해 죽임 당한 아기들을 애도하는 베들레헴 여인들의 눈물과도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역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겪었던 나그네 세월의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구십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잃을 뻔했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던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거나, 윤리적 실존을 넘어서는 종교적 실존의 패러독스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곤 합니다. 또 인신제물을 바치던 습속에서 벗어나 동물제물을 바치는 행태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보다 이삭에게 초점을 맞춰 신의 제단 앞에 스스로를 바치는 이삭의 모습을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케다(Akedah)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해석이든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라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태 속에 들어온 생명을 애지중지 돌보고 산고를 겪으며 출산한 아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사라는 제외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인 마크 샤갈은 사라를 잊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이삭의 희생>(Le sacrifice d'Isaac, 230*235cm)이라는 그림과 만났을 때 나는 오랫동안 그 그림 앞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샤갈은 붉은색 옷을 입은 아브라함의 주위도 온통 붉은 색으로 채색함으로써 그 상황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른손에 칼을 든 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가 황급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작 더미 위에 누워있는 이삭의 모습은 평온해 보입니다. 샤갈은 이삭을 노란색으로 칠함으로써 영적으로 승화된 상태임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화면의 왼편 나무 아래에는 어린 숫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양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서 우리는 슬픔에 잠긴 사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들어올린 채 절규하고 있습니다. 펼쳐진 손가락이 사라가 느끼는 고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샤갈은 그림의 상단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를 그려넣었습니다. 울고 있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샤갈은 사라와 마리아를 고통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합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세상 도처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섣부른 위로나 충고 없이 아픔을 아픔으로 제시하는 샤갈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 아픔 혹은 슬픔 속에서 길을 잃는 이들도 있지만 그 슬픔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과 깊이 연결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탄식시에서도 '나'라는 시적 자아가 어느 결에 '우리'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철학자 김상봉 선생은 슬픔을 수동성의 장소 혹은 자기부정성의 장소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수동성 속에서만 존재가 열린다고 말합니다(김상봉과 고명섭의 철학 대담, <만남의 철학>, 도서출판 길, 2015년 7월 25일, p.379 참고). 슬픔이야말로 '너'에게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고통이 그냥 '나'만의 고통에 머물 때 감상 혹은 애상에 빠지지 쉽지만 그것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화할 때 그 고통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합니다. 선생님의 탄식시들은 그렇기에 지금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치유 사건도 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라는 책을 읽다가 그리스 시골 마을 사람들의 장례 풍습 이야기를 들으며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여인들은 자기들의 비애와 고통을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요.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톱으로 자기 뺨을 할퀴기도 하면서 곡을 합니다. 무덤 속으로 관이 내려갈 때는 비명을 지르며 무덤으로 몸을 던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관습적으로 형성된 애도의 형식이긴 하지만 슬픔의 수문을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화해를 도모합니다. 패트릭 리 퍼머는 "서양의 점잖고 소박한 장례식, 소리를 낮춘 목소리와 자기절제, 용감한 미소, 침착함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질식시키거나, 땅속으로 몰아넣어 그곳에서 음험하고 위험하게 뿌리를 뻗으며 평생 곪아터지게 놔둔다"고 말합니다(패트릭 리 퍼머, <그리스의 끝 마니>, 봄날의책, 2014년 7월 21일, p.109). 


나는 아직 슬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존재 일반 속에 깃든 슬픔의 정한에 깊이 사로잡힌 채 살고 있고, 육친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참척의 고통을 겪은 이들의 슬픔에 견딜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각혈을 하듯 토해내신 탄식시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내보일 용기를 내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섣부른 희망이나 위로가 아닌 슬픔의 연대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남은 생이 조금은 더 밝아지고, 삶이 주는 행복 또한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탄식시를 읽는 동안 내내 백건우 선생이 연주한 '사랑의 죽음'(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곡을 리스트가 편곡한 것)과 리스트의 '침울한 곤돌라 2번'을 들었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그 연주를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앤 윔즈(Ann Weems)의 <세상의 모든 라헬을 위한 시편>(가제) 초고를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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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린(15 09-26 10:09)
탄식시 속의 슬픔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침묵"이라는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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