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41-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 2015년 10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


안녕하신지요? 

한로를 앞둔 절기여서인지 조석 기운이 선선합니다. 새벽녘에는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개울가에 핀 물억새가 갈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을 때 선생님은 문 밖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짧은 시간의 응시였겠지만 공교롭게도 눈길이 그렇게 마주친 것이지요. 누구시냐고 묻는 제게 선생님은 제 글을 읽고 꼭 만나고 싶어 어렵게 찾아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은 설렘이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의례적인 응대만 하고  얼른 하던 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를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저는 이야기 속에 충실히 빠져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염색을 전공한 아티스트로 강북에 있는 중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초대전과 개인전을 몇 차례 하셨으니 중견작가이시겠습니다. 개인전을 할 때 교회의 여러 어르신들이 방문해 주셨는데, 그런 전시 공간에 생전 처음 와봤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가슴이 무지근해졌다고 말씀하실 때 저는 선생님의 눈가에 어린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렇지요. 이런저런 전시회나 연주회장을 찾아다니는 일이 일상의 한 부분인 사람들도 있지만 평생 가도 그런 기회를 한번도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작년인가요?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의 섬마을 연주회를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왜 아끼는 피아노를 차에 싣고 음향시설이 잘 된 음악당이 아니라 섬마을을 찾아갔을까요? 백건우 선생은 한번도 그런 문화 혜택을 누려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마음이 눈물겹게 고마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연주자였기에 감동은 더욱 컸습니다. 더러 뱃고동소리도 섞이고 개가 짓는 소리도 들렸지만 연주를 감상하는 섬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시종 진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발생하는 사건임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전시회에 오지 못한 분들에게도 그 작품들을 감상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교회의 열린 공간에 그 작품들을 한시적으로나마 걸고 싶었는데 책임자로부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셨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조금 흥분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라거나 '어쩜 그럴 수가 있지요?'라며 맞장구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일의 맥락을 소상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린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자기를 뜨기 전 자신에게 당부할 말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초면인 분에게 제가 무슨 당부를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주제 넘게도 기독교인이라 하여 신앙을 직정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작업에 몰두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장면을 형상화한 많은 미술 작품과 만납니다. 위대한 화가들은 그 사건을 재연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자기 속에서 일으킨 변화나 암암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마치 물결에 밀려 한곳에 쌓인 보드라운 모래처럼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기 속에 새겨놓은 무늬 혹은 결절(結節)을 드러내려 합니다. 화가들은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 형태와 색채를 통해 그 무늬나 결절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손사래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의도에서 벗어나기 일쑤입니다. 


그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쉬운 길을 택합니다. 경건함을 가장하거나 소재주의에 탐닉하는 것이지요.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합니다만 기독교적 소재를 즐겨 다루는 국내 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나 인생의 비의가 아니라 작가들의 나르시시즘인 경우가 많습니다. 심미적 체험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특수합니다. 하지만 그 체험을 표현하려 할 때는 온축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빛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때 오롯이 드러나듯이 표현되는 것은 표현될 수 없는 것까지 내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선생님께 신앙을 너무 직정적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종교예술은 꼭 종교적 소재를 다뤄야 하는 것일까요? 발터 니그는 "종교적 소재를 담지 않은 종교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구스타프 하르트라우프의 말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대답은 너무 편협하지 않은가? 렘브란트의 <풍차가 있는 풍경>이 과연 비종교적인가? 바흐의 음악은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가장 경건하지 않은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은 복음의 깊이에 부합하지 않는다. 겉으로 종교적으로 보여도 속물 정신에서 나온 그림이 있고, 세속의 사물이 아주 강하게 종교적인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신성은 종교 영역과 세속 영역으로 나뉘지 않는다. 이 두 영역이 신성 안에서 서로 화합하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발터 니그, <조르주 루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2012년 12월, p.29)


'겉으로 종교적으로 보여도 속물 정신에서 나온 그림이 있고, 세속의 사물이 아주 강하게 종교적인 경우도 있다'는 말이 아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일상의 성화'라는 나의 관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1655년경)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떠오릅니다. 도무지 빛의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이었습니다. 도살된 소가 허공 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잘 다루지 않는 노인, 장애인, 거지, 부랑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고 그들을 자기 그림 속에 담아냈던 렘브란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살된 소는 정말 뜻밖이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도축장인지 푸줏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발굽과 머리는 잘려 있고 몸통은 좌우로 갈라져 있습니다. 가죽은 벗겨지고 뿔도 뽑혀 있습니다. 가만히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비릿한 피샘새가 날 것만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른 풀밭 위를 여유롭게 걸어다녔을 피조물이 물체로 환원되어 걸려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삶의 덧없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회피하고 싶은 그 그림을 자꾸 들여다보는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655년이면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끝난지 몇 해 지나지 않은 때입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해도 네덜란드가 겪은 전쟁과 폭력의 회오리는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렘브란트는 이 무렵 파산을 선고 받기도 했습니다. 예민했던 화가는 도살된 채 나무에 걸려 있는 소를 통해 자기 모습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그림 속에서 이리저리 찢긴 유럽의 모습과 모욕당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 듯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비전문가의 추측일 따름입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니 도살된 소는 마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어떤 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설주 뒤에 숨은 채 빠꼼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통스럽지만 계속되어야 할 삶이었을까요? 절망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희망이었을까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집니다.


저는 어둠을 모르는 빛, 절망의 심연을 거치지 않은 희망, 대가를 치르지 않고 주어지는 은혜, 추함을 외면하는 아름다움, 불화의 쓰림을 알지 못하는 조화, 흔들림조차 없는 확신, 일상을 떠난 영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흔들림 속에서 든든함을 지향하고, 추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가장 속된 것 속에서 거룩한 것을 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의 길은 흔들리며 걷는 길입니다. 


며칠 전 문병란 시인(1933-2015)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새벽의 서>라는 시선집을 읽으며 가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나서 그 책을 다시 꺼내 들고 처가집 벌초하듯 듬성듬성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아랍의 하느님'이라는 시에서 그만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실까?

꽃 속에 계실까?

돌멩이 속에 계실까?

아니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썩은 시체 위에

한 마리의 쉬파리로 붕붕거리고 계실까?


머나 먼 아랍, 그보다 가까운

나의 조국 임진강 언덕 위에

가시 철조망으로 계시고

사막의 선인장 가시 위에

야보롯이 피어나는 요요로운 꽃으로 계시고

덩굴 찔레의 콕콕 찌르는 가시로 계시는

나의 하느님, 오늘은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랍 여인의

썩은 창자 속에서

한 마리 구더기로 

더러운 냄새로 오시는 나의 하느님!

(문병란, <새벽의 書> 일월서각, 1983년 8월 20일, p.196, '아랍의 하느님' 부분)


누군가는 불경하다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아픔을 통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더럽고 추하고 사소한 것들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정으로 거룩한 분이십니다. 속된 것 따로 거룩한 것 따로인 세상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술에 대한 문외한이 한 말을 너무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청명한 저 가을 하늘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맑음을 상기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루하루 그분과 동행하며 기뻐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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