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희망의 전령 2015년 10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희망의 전령


며칠 전 외국에서 살고 있는 벗이 전화를 걸어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 후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어 보이나?" 뜬금없는 질문에 허허 웃자 그는 역사가 나선형으로 진보한다고 믿고는 있지만 도무지 현실의 어둠이 가실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서해바다처럼 쓸쓸한 벗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심연을 뚫고 솟아나온다고 다른 이들에게는 잘도 말해왔지만, 현실의 어둠 속에서 그만 길을 잃은 것 같다며 그는 깊은 탄식을 뱉아냈다.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누가 그 희망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래도 벗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정신이 멍해진 상태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문득 여러 해 전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난 세기 중반 영국 북부의 탄광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 탄광은 안전시설이 매우 미비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곤 했다. 광부들이 믿을 것이라곤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강철같은 근육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 아니던가. 어느 날 갱도가 무너져서 12명의 광부들이 굴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이 일하고 있던 곳은 갱도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석탄의 분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광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조용히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은 소리가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던 것이다. 일순 절망감이 몰려왔다. ‘구조자들이 때맞추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누군가가 통로를 개척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면 가뜩이나 부족한 산소를 급격히 소비하게 될 것이라며 그저 기다리자고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계시원”(time keeper)을 부르더니 남은 시간이 얼마냐고 물었다. 광부들의 작업 시간과 산소량을 체크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계시원이 대답했다. “사고 나기 직전이 10시 30분이었어. 우리는 모두 12명이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대략 2시간 분량의 산소가 남아 있어. 아마 별 일 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맑고 확고하고 강했다.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갱도의 저편에서 들려올 기계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누군가가 “몇 시지?” 하고 물을 때마다 계시원은 성냥불을 켜서 시계를 확인하고는 “십 오분이 지났어”, “이제 겨우 10분 지났다구” 하며 대꾸했다. 묻고 대답하는 인터벌이 점점 길어졌고, 모두가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무도 잠들지는 않았다. 산소가 거의 떨어져 간다고 생각할 즈음 바위틈으로 달콤한 곡괭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아무도 더 이상 시간을 묻지 않았다. 두 시간이 거의 지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신선한 공기가 갱도를 통해 밀려들어오고, 랜턴 불빛이 비쳐들면서 그들은 구조되었다. 그들 중 몇몇은 일부러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의 음성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광부들과 아내, 친척들과 눈물범벅이 되어 뒤엉켰다. 12명 중 희생된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계시원이었다. 마을의 목사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을 때, 광부들의 안도의 눈물은 슬픔과 경악으로 이어졌다. 왜 계시원만 죽었단 말인가? 목사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여섯 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시원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을 때 그들은 계시원의 시계가 사고 당시인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았다. 계시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면서도, 동료들을 비추어 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소진했던 것이다. 


희망을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절망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가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속의 어둠을 살라 희망의 불꽃을 피우는 것 말이다. 우리, 그런 희망의 전령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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