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산책6 2015년 11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양과 목자, 가름의 기준 본문 / 마태25:31-46 양과 염소의 가름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긴장감을 자아낸다. 우리 삶에 대한 최종적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는 날 모든 민족이 그 앞으로 소환된다. 인자이신 예수는 심판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민족들을 혹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가른다. 나찌의 절멸수용소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이 갈렸던 사실을 떠올릴 때 이 장면은 매우 섬뜩하게 느껴진다. 본문에서 심판의 기준을 통과한 이는 '양'으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이들은 '염소'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비유를 위한 표상일 뿐 그 동물들의 생물학적인 특색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에스겔도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34:17)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태이지 생물학적인 종이 아니다.  그러면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태도이다. 인자는 오른편의 양들에게 말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의인'이라 지칭된 이들은 당황스러워한다. 심판의 자리에 앉으신 분과 그런 고통의 자리에서 마주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좌에 앉으신 임금은 단호하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인자이신 주님은 자기와 '지극히 작은 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염소로 분류된 이들 역시 자기들과 인자이신 주님이 마주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님은 명료하게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흔히 '지극히 작은 자'는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마태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 말이 매우 한정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다.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소유도, 안전을 위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세상을 떠돌던 초기 선교사들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마태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그들은 매우 취약한 처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내면의 확신이 필요했다.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셨던 말씀은 그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였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낯선 타자의 얼굴 그러나 이 대목을 그렇게 한정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복음서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서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는 아픔과 눈물의 자리로 내려가곤 하셨다. 모두가 꺼리는 병든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을 당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이 본문이 마태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극히 작은 자'를 마태 공동체를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지나친 축소가 아닐까? 오늘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대목을 새롭게 재해석해야 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낯선 타자'는 막연히 낯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대면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곧 마태가 범주화한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 말이다. 레비나스의 말은 이런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모습으로, 쪽방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의 죽음으로 가슴이 무너진 이의 모습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생각하는 이의 모습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고난을 받는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고 계신다. 예수는 고통받는 이들을 '내 형제'라 부르신다. 진실한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주님은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에게 말한다.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그러나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함으로 참된 인간의 길을 저버린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믿음의 진실성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향유, 그리고 은 삼십 본문 / 마태26:1-16 수난 이야기의 시작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자신의 수난을 여러 차례 예고했지만, 먹장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듯 수난은 26장에서부터 구체적 현실로 다가온다. 수난 이야기의 시작은 의미심장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은 이제 '다' 끝났다. 남은 것은 그가 몸으로 겪어내야 할 일 뿐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 미래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팔리리라'의 원문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일종의 선언이다. 예수는 배신당하고 종처럼 팔리게 되는 현실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오랜 식민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메시야가 유월절에 오실 거라고 기대했다. 예수는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처럼 당신이 그렇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3절은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서 예수를 잡아 죽일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의 죽음에 현직 대세사장과 대제사장 가문이 연루되어 있다고 말한다. 참담하지 않은가. 생명 살림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이 성전 체제를 뒤흔들고 있다 하여 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 종교는 권력과 손을 잡거나 권력에 맛들일 때 반드시 변질되게 마련이다.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는 이들이 생명을 없애기 위해 흉계를 꾸민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죄라 여기지 않는다. 영혼의 둔감함이 다. 이런 것을 일러 교종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치매라 일렀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매우 기민할 뿐만 아니라, 용의주도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5).  향유를 부은 여인 수난 이야기의 시작을 간결하게 갈무리한 마태는 다른 장면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예수 일행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병환자의 집에 머묾 자체가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파격이었다. '정결과 부정'을 철저히 가르는 세상의 경계를 예수 공동체는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마태는 그 여인이 누구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후대 사람들은 왜곡된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를 이 여인에게 투사하여 행실이 나쁜 여자라고 단정하곤 한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향유를 부은 것도 그의 누이인 마리아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요12:1-8).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자들은 분개하면서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8-9) 하며 여인을 나무란다. 예수는 이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 이르시면서, 여인의 행동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신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유대인들은 죽은 자를 묻어주는 행위를 가장 큰 선행으로 여겼다. 예수의 말은 바로 이런 사회적 통념을 배경으로 발설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분노와 예수의 적극적 의미 부여 사이에서 여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여인은 왜 그 귀한 향유를 예수에게 부었을까? 문득 한명희의 시 '끝이라는 말'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등불도 없이 밤길을 나서야 하는 처지에 빠져 있다. 막 배가 떠나버린 선착장에서 오래도록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서 있다. 아득하고 막막하다. 본문의 여인은 아마도 그런 처지였으리라. 그런데 예수에게서 자기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주는 고향을 맛보았던 것일까? 폴 틸리히는 이 여인의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 일렀다. 예수는 이 여인이 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에서든지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다.  14절부터 16절까지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다루고 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라는 구절은 앞 장면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헌신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룟 유다라 하는 자'라는 표현 속에는 그에 대한 경멸이 짙게 배어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터이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달라고 청한다. 그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 은 삼십은 백성들의 불신앙과 배덕을 암시하는 스가랴 11장 12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다가 스승을 배신한 까닭을 정치 신학적 입장의 차이나, 유다의 탐욕에서 찾으려 한다. 더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가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마태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남김없이 말하고 싶은 욕망을 자제함으로써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존재의 심연과 마주치도록 하고 있다. 소포클레스는 비극 '안티고네'에서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인간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 만찬 본문 / 마태26:17-35 상황을 주도하다 죽음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예수는 뒤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하게 그 죽음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아가야 할 때가 있고 물러날 때가 있지만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임을 예수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무교절의 첫날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17). 예수는 평온하게 이른다.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18). 예수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마태는 만찬을 준비할 사람의 이름을 '아무'라는 대명사로 처리함으로써 그를 보호하려 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라 이르셨다(막14:13, 눅22:10). '내 때'는 하나님의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시간 속으로 영원이 돌입하는 순간, 유한함과 무한함이 부드럽게 포옹하는 시간, 그것은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예수의 삶은 그 '때'를 향한 순례였다. 죽음에의 충동 때문에 산 것은 아니지만 순례길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면 굳이 피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마침내 유월절 식탁이 마련되었고 날이 저물자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음식을 드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처럼 근사한, 격식있는 식사자리는 아니었겠지만, 애굽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상기하는 그 식탁은 나름 장엄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예수의 울가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근심하며 각각 묻는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자기 마음을 살펴보면 될 일을 왜 주님께 묻는 것일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순정함을 공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일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3). 이것은 예수와의 근접성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한 식구처럼 지내던 이가 그를 배신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어쩌면 시편 구절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예수는 배신자에게도 연민을 보인다. 스승을 죽음의 벼랑 앞에 세우는 그의 선택은 실상은 자기 존재의 무화로 이어짐을 그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4). 유다도 여느 제자들처럼 묻는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다른 제자들이 스승을 '주'로 지칭한데 비해 유다는 '랍비'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선생님' 혹은 '랍비'로 부르는 이들은 대개 불신자들이다. 그는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일까? 유다의 질문에 예수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네가 말하였도다". 이것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것은 네 말이다' 혹은 '네가 잘 알 것 아니냐' 정도의 유보적 의미일 뿐이다.  예수는 떡을 들고 축복하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26). 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후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8).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였던 것처럼 예수가 흘리는 피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피가 생명의 상징이라면 피흘림은 죽음의 상징이다. 예수가 생명을 다하여 하고자 했던 일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적 존재로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예수의 언약의 피에 동참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이 된다. 예수와 제자들은 할렐 시편 찬송을 부르며 감람 산으로 올라갔다. 배신 예고 그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능동적으로 버린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긴장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2). 예수는 적의의 풍랑에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상황의 전모를 홀로 이해하고 있다. 당신의 운명으로부터 달아날 제자들이지만 예수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그러하듯 베드로가 나서서 말한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 하지만 예수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 이 말은 일점 의혹도 없는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늘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평상시에 애써 유지하고 있던 자기 정체성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던가.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다. 주님께서 이미 그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니 말이다. 희망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겟세마네의 기도, 그리고 체포 본문 / 마태26:36-56 아, 겟세마네 겟세마네,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올리브 나무가 우거진 그곳은 예수 일행이 자주 가던 곳이다. 예수의 삶을 나아감과 물러남의 통일이라고 보면 겟세마네는 물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누가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이야기를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겟세마네는 그러니까 예수 일행의 휴식처요, 기도처였던 셈이다. 그곳은 마치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고단한 선교여행에서 돌아오면 늘 머물렀던 곳, 수바시오 산 깊은 곳에 있던 카리체리 은둔소와 같은 곳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36)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신 후 그들에게 당신의 내면의 불안을 드러내 보인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 마태는 예수를 신적 고요함 속에 머무는 이로 그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예수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했다가 퇴각할 때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채 느긋하게 전장을 걸었다는 소크라테스의 평온이 예수에게는 없다. 그도 또한 누군가의 정신적 지원이 필요한 존재이다. 예수는 그 측근 제자들에게서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가신다. 거리상으로 그렇게 멀지는 않았겠지만 그 이중적 거리 만들기는 예수의 고독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곳에서 예수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를 올린다. 그의 기도 자세는 내적 동요의 심각성을 반영하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여러 화가들이 그린 것처럼 교교한 달빛 아래 단정하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요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 '잔'은 물론 죽음의 은유이다. 성경에서 잔은 구원과 은총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시23:5)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를 나타낼 때가 많다(시11:6, 75:8, 사51:17, 렘25:15). 적대자들의 음모에 따라 수치와 고통 가운데 죽게 된 예수는 그 쓴 잔이 지나가기를 바란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와 '그러나' 사이에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거대한 단절이 있다. 이것을 한달음에 읽으면 예수를 사로잡고 있던 고뇌의 깊이를 느낄 수 없다. 때로는 침묵도 응답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다.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한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예수는 베드로를 가볍게 나무라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0-41). 38절에도 나온 '나와 함께'라는 말이 다시금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스승을 버리고 달아날 제자들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흐트러진 상태를 말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괴로움을 모른다. 같은 기도가 세 번 반복되고, 제자들은 그 때마다 잠에 빠져 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베드로의 부인은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는 단호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6). 이제는 고뇌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진 이상 그 뜻을 옹골차게 받들 뿐이다. 예수는 고난을 향해 확고한 걸음으로 나아간다.  유다의 배신, 그리고 체포 마침내 유다의 시간이 왔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를 대동하고 그곳에 왔다. 유다는 예수를 입맞추어 배신한다. 친교와 존경의 뜻인 입맞춤이 배신의 암호가 되고 있다. 그에게 예수는 주님이 아니라 '랍비'이다. 이미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예수는 흔들림없는 어조로 말한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칼과 몽치를 든 이들이 예수를 잡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칼을 빼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는 소동이 벌어진다. 예수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52)라고 말씀으로 제자를 엄히 꾸짖으신다. 예수의 길은 '비폭력 저항'의 길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바로 그 사실에 기초한다. 로마제국이 폭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폭력에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그것이 예수 운동의 새로움이다.  예수는 그 혼돈 가운데서도 여전히 진리를 가르치시는 스승이다. 칼과 몽치를 들고 온 이들을 향해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인 위험 인물이 아님을 넌지시 드러낸다. 마태는 사태가 그렇게 돌아가게 된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부연한다. 일종의 기독론적인 가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예고되었던 일이 이루어진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 불의한 재판 번제로 바쳐지기 위해 묶인 이삭처럼 예수는 묶인 상태로 끌려갔다.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에 대한 적의가 승리를 거둔 듯 보인다. 가야바의 관저에는 이미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모여 예수를 죽일 증거를 찾고 있었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58). '멀찍이', '그 결말을 보려고'. 예수와 베드로는 이처럼 분리되어 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호기롭던 그의 장담은 속절없는 빈 말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는 자기가 두려움 앞에서 이렇게 철저히 무력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게 사람이다.  예수에 대한 심문 혹은 재판은 부당한 재판의 전형이다. 예수를 잡아간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이미 결안한 바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에 합당한 죄목을 찾는 일이다. 여러 거짓 증인들이 나서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와서 말한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61). 왜곡이다. 예수는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했지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마24:2). 대제사장은 그 거짓 증언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성전을 모독한 자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대제사장은 심문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예수에게 최후의 변론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예수는 침묵할 뿐이다. 말이 부질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음모를 꾸미는 이들에게 피의자의 침묵은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지나 보다. 대제사장은 질문을 바꿔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b). 그러자 예수가 대답한다. "네가 말하였느니라"(64a). 긍정인가, 부정인가? 유보적인 긍정이다. 이윽고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 이 장면에서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계시한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예수와 대제사장의 부딪침은 새로운 세대와 낡은 세대의 부딪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세계관의 충돌이다. 한쪽은 무력하고 다른 한쪽은 힘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은 개인의 자유 혹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제정된 법이 강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신성 모독의 혐의를 덧씌운 후 사람들의 생각을 묻는다. 공회원들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온갖 조롱을 다 퍼부었다.

 

15세기의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1440-1)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에메랄드 빛 벽면을 배경으로 흰색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홀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공이 들려 있다. 그의 주변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들이 그려져 있다. 막대기를 들고 예수를 때리는 손, 침을 뱉고 있는 이의 얼굴, 조롱하고 때리기 위해 펼쳐진 손바닥과 손등. 그 아래쪽에는 묵상에 잠긴 도미니크 성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 그림은 마치 우리에게 예수를 때리고 침을 뱉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닭울음 소리가 들릴 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차마 예수를 외면할 수는 없어 그곳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이들 앞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그가 바깥 뜰에 앉아 있을 때 여종 하나가 나아와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고 말하자 그는 그 사실을 부인한 후에 앞문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도 다른 여종이 그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며 부인한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이 "너도 진실로 그의 도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확언하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한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 단순한 부인에서 맹세하며 하는 부인으로, 더 나아가 저주하며 하는 부인으로 전개된다. 베드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그 상황에 마구 떠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닭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심한 동물의 울음 소리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말씀을 일깨웠다. 베드로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 베드로는 지워졌다. 장하던 의기는 어느 결에 꺾였고 남은 것은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실존이었다. 포도송이에 비유하자면 베드로는 으깨진 포도알갱이가 된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트라우마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졌다. 그는 과연 한용운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말한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라에 '당신'과 만날 수 있을까?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심

본문 / 마태27:1-26

새벽,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시인 정일근은 새벽을 가리켜 "귀신으로 잠들었다 사람으로 눈을 뜨는 시간,/어둠과 빛 사이 잠깐 저 푸른 시간"('새벽과 아침 사이' 중에서)이라 했다. 새벽은 누군가에게는 설렘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삼키며 견뎌야 할 고난의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다. 야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유다의 죽음

마태는 독자들의 시선을 잠시 가룟 유다에게로 돌리게 한다. 빌라도의 재판 이야기 속에 삽입된 이 이야기는 매우 단절적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배경은 성전이다. 마태는 예수가 정죄되는 것을 보고 유다가 뉘우쳤다고 전한다. 그 뉘우침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자책이다. 그는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되돌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a)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그것은 자기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서 "네가 당하라"고 말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뉘우칠 수는 있지만 무화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은 후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죄에 대한 형벌의 집행관이 된 것이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통곡했던 베드로와 대조적이다. 마태는 왜 재판 이야기의 진행을 끊으면서까지 유다 이야기를 끼어 넣은 것일까? 유다의 진술을 통해 예수의 무죄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유다는 은 삼십을 돌려줌으로 예수 죽음의 궁극적 책임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무죄함을 강변하지만 핏값인 은 삼십을 성전고에 넣어 둘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 일이 부당한 일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마태는 그 돈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쓰였고, 그 밭은 나그네들의 묘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어리석은 열정

마침내 예수가 총독 앞에 섰다. 총독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네 말이 옳도다".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그렇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새번역은 이것을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로 옮겼고, 공동번역은 "그것은 네 말이다"로 옮겨놓았다. 알쏭달쏭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뭐라 고발하든 예수는 자기를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53:7a). 빌라도는 이미 예수가 무고한 사람이며, 성전 체제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는 그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권력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는 체제전복적인 위험 인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정말 그러한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행위만을 체제전복적으로 본다면 그의 판단이 옳다. 하지만 예수가 로마제국이 기대고 있던 가치의 토대를 뒤흔들었다는 측면에서는 그의 판단이 그릇되었다. 여하튼 빌라도는 완강한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는 이 사나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죽음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명절 때마다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관례를 언급하며 바라바와 예수 가운데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마가는 바라바를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막15:7)로 소개하고 있지만 마태는 그저 '유명한 죄수'라고 서술할 뿐이다. 유명하다는 말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마태는 이 긴박한 장면 가운데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를 삽입한다. 마태복음에서는 꿈 이야기가 많다. 요셉이 꾼 꿈 이야기나 동방박사들의 꿈 이야기가 그것이다. 꿈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통로 가운데 하나이다. 총독의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9) 하고 말한다. 총독의 아내가 여기 등장하는 것은 예수의 무죄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치게 한다. 주체가 되지 못한 즉자적 군중들은 언제나 그릇된 권력의 도구로 화할 수 있다. 플라톤도 <국가>에서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통치하는 민주정이 자칫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무리들의 오도된 열정은 반성을 모른다. 내친 김에 달려가는 것이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무리의 강력한 요청 앞에서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 두려워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말한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다에게 했던 말을 빌라도가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뒤집혀 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 '무리'라 지칭되던 이들이 여기서는 '백성'(laos)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 단어는 계약 백성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이 말로 인해 역사 속에서 벌어지게 될 참극을 짐작이나 했을까? 예수는 마침내 죽음의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본문 / 마태27:27-44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 박사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합일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합일화란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혹은 조직)의 태도와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병적인 합일화는 "상대를 이상화하고 그의 신념과 인격, 정서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합일화의 욕구는 자기 스스로를 긍정할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강하게 마련이다. 강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강화하려 하지만 실상은 내적으로 병든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예수를 넘겨 받은 로마 군인들은 총독의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온 군대를 모은다. 예수를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괴롭히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함께 맛보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난히 악인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있던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후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해도 어느 순간 별다른 가책 없이 악한 일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무사유'(thoughtlessness)이다. 

군병들은 죄수들을 희롱하고 괴롭히는 일에 이미 익숙한 듯하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로마 군인들이 어깨에 걸치는 망토)를 입혔다. 조롱하기 위한 장치이다. 일말의 가책도 망설임도 없이 능란하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의 말을 건넸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 피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멸시의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다. 왕으로 지칭된 이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기도 했다. 멸시를 받고 조롱을 받는 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군인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메운 채 길을 떠난다. 죽음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 아래 풍경

아마도 기력이 쇠하신 예수가 자꾸 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채찍에 맞은 탓일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가 채찍질 당하시던 그 참담한 광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감정 과잉의 신파조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마태는 수난 이야기를 매우 담백하게 서술한다. 일의 자초지종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마태는 군인들이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했다고 말한다. 비상시에 로마 군인들은 시민들을 징발하여 짐을 나르도록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 아침에 시몬은 불운했다. 하지만 불운했던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그의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내 십자가의 행렬은 골고다, 곧 사람들이 해골의 곳이라 부르는 곳에서 이르렀다. 군인들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에게 주어 마시게 하려 한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 앞에 선 이에 대한 연민의 몸짓처럼 보이지만 조롱의 몸짓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자신의 적대자들이 한 행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심각한 상황을 마태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치 툭 던지듯 말하고 있다. 인류의 온갖 모순이 그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고 있건만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하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기에 그 비통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예수의 유일한 소유라고 할 수 있는 옷은 군병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벌거벗기운 자의 수치와 고통이 지속되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부착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강도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 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강도(lestai)는 문자 그대로 남의 재물을 폭력을 사용해 빼앗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로서 폭력 혁명을 시도했던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레스타이'는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유대 독립을 위해 싸운 전사들을 칭할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지금까지 마태는 예수 처형의 책임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변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그가 위험한 인물군에 속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누가와 요한은 예수의 좌우편에 매달린 이들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행악자'로(23:33), 요한은 아주 단순하게 '다른 두 사람'으로(19:18).

마태가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십자가 아래에 있던 구경꾼들의 태도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39)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에 동참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42). 득의만면한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에게 욕을 퍼부었다. 예수가 가르친 비폭력 저항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를 향한 사람들의 모욕과 희롱, 우리는 이 속에서 인간의 악마성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아래에서만 벌어지는 현실이 아니다. 지금도 무고하고 무력한 이들은 일상적 폭력과 조롱 속에서 살아가지 않던가. 

죽음, 그리고 무덤

본문 / 마태27:45-66

온 땅에 어둠이 내리고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거니"(45). 제육시는 정오를 가리킨다. 니체는 정오를 그림자가 자기와 통합되는 깨달음의 시간, 독수리와 뱀이 친구처럼 하나되어 비상하는 시간, 순간과 영원이 통합되는 시간이라 말했다. 물론 이것은 은유이다. 정오의 사상가를 자처했던 알베르 카뮈는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투명함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골고다의 현실 앞에서 정오의 태양도 부끄러웠는지 몸을 숨겼다. 온 땅에 임한 어둠은 불길하다. 하지만 그 어둠의 태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법이다. 오후 세시, 예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물론 이것은 시편 22편의 일부이다. 예수는 버림받음의 고통을 그 시에 담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예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철회를 의미하나? 마태는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 22편의 맥락에서 보자면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다. 

십자가 아래 섰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자, 다른 한 사람이 해면에 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게 했다. 유대의 전설은 메시야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자기들의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일까? 그렇게 보면 포도주로 입술을 축여준 것은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는 영혼이 떠나가셨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1-53). 이것은 변고이다. 하늘도 슬펐음인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제의 체제의 무너짐을 상징한다. 지진과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마태는 이 일이 예수의 부활 후에 일어났다고 서둘러 마무리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한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말한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 마가와 누가는 이런 고백의 주체가 '백부장'이었다고 말하지만 마태는 백부장은 물론 예수를 지키던 사람들의 집단적 고백으로 처리하고 있다. 마가와 누가는 십자가 사건이 백부장에게 일으킨 내적인 흔들림을 넌지시 보여주는 반면, 마태는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는 갈릴리에서 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르던 여인들과 십자가 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 남성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을 중심으로 맺어졌던 관계와 존재를 중심으로 맺어졌던 관계를 유추하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무덤에 머물다

해가 저뭇할 무렵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했다. 마태는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소개한다. 헨리 나우웬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꿈을 공유하면서 자기 삶을 지속하고 있던 이들을 일러 '시름하는 동조자'라 했다.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 베다니의 나사로,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십자가는 정치적 반역죄를 저지른 이를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것임을 우리는 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라는 지적을 받았을 때 저주하고 맹세하며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몸을 도사리지 않고 자신이 그와 연루되었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시체를 넘겨받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음으로 장례를 엄수했다. 무덤 앞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역시 용의주도하다. 저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가 살아계실 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63-64a). 경계를 소홀히 하면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숨긴 후에 백성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64b) 우려된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어주며 그들로 하여금 '힘대로 굳게' 지키게 하라고 이른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 '힘대로 굳게'라는 구절과 '돌을 인봉하고'라는 구절은 저들의 노력이 부활 사건 앞에서는 부질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일종의 배경이 되고 있다. 참된 생명은 죽지 않는다. 힘을 가진 자들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밝아오는 새벽빛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을 가두고 돌로 인봉하고 힘써 지켜보아도 소용이 없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본문 / 마태28:1-20

전대미문의 현실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하루 반이 지나갔다. 날짜로 사흘. 예수는 무덤 속에 계셨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다고는 말했지만 제자들의 무겁고 쓰린 한숨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의 숨죽인 울음을 제외하고는 세상은 그대로였다. 예수를 가둔 무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는 기표처럼 그곳에 있었다. 마침내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저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갔다. 그런데 그들은 또 다시 초자연적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2-4). 마태는 묵시문학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의 임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이미지들을 동원하고 있다.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 냈다는 이야기는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들을 시켜 힘써 지키게 했던 적대자들의 시도가 부질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는 지키던 이들이 극심한 두려움 속에 있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무서워하지 말라면서 천사가 여인들에게 전한 메시지이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둘째,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전하라. 이 전대미문의 전언 앞에서 여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무서움과 기쁨이다. 무서움은 공포가 아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와 만날 때 느끼는 내적인 흔들림인 동시에 경외심이다. 기쁨은 그 사태를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가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발생한 감정이다. 여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음질한다. 무덤을 향해 걸어오던 때의 그 무거움은 이미 사라졌다. 마치 물결 위를 걷듯, 무게를 잊은 듯 여인들이 달려간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앞에 다가오시며 인사를 건네신다. "평안하냐?" 사실 이 단어 속에는 '기뻐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상적 인사이지만 부활의 새벽에 건네진 인사이기에 평안의 인사는 더욱 각별하다. 여인들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드린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가 "나를 붙들지 말라"(20:17)고 경계하셨다고 전하지만 마태는 예수와 주님의 접촉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윽고 예수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10).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형제들'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형제들'이라 칭하신다. 제자들은 다 '주'요 '스승'인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주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이 가없는 받아들임과 용서야말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둥지가 아닐까?

11절에서 마태는 다시금 경비병들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들 중 몇 명이 성으로 들어가 대제장들에게 자초지종을 다 알린다. 예수의 부활은 그를 따르고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은 이들에게는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또 다시 모의를 한다. 그리고 군인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몰래 와서 예수의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고 증언하도록 유인한다. 거짓 증언을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부추기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그들이 애써 유지하려던 성전 체제가 이미 내적으로 붕괴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임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열한 제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가와 누가는 현현 이야기를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인근에 배치한데 비해 마태는 갈릴리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것도 방이나 거리가 아니라 산을 현현의 장소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태복음에서 산은 일쑤 주님의 가르침과 계시가 주어지는 장소로 나타난다. 그 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뵈옵고 경배했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활은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경계 저편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위임을 단행한다. 

위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기독론적인 표현으로 시작된다. 세상 통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예수는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재차 위임하신다. 그 위임의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다.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는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을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마태는 이방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적시하고 있다. 선교의 목표는 제자를 삼아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 위임에서 제자 삼음과 세례 베풂은 틈 없이 연결된다. 위임에 확언이 따른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0b). 눈에 보이진 않아도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 '함께 하시는 주님', 임마누엘, 우리 삶의 희망은 여기서 움터나온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