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누구의 올바름인가? 2015년 11월 06일
작성자 김기석

 누구의 올바름인가?


2015년도 노벨문학상은 벨라루스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갔다. 그의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986년 4월 26일 밤에 벌어진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 빚어낸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그 사건으로 인해 삶이 황폐해진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다성악적 기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대신 전해준다. 집필 기간만 10년 이상이 걸린 이 소설은 소설인 동시에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일상적인 감정, 생각, 발언을 기록하고 수집한다. 영혼의 일상을 잡으려 노력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런데 이곳에는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다." 지속적으로 고통을 겪으며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찌 평범할 수 있겠는가.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그 사건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들의 절통한 사연과 더불어 체제 안정을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하는 관계당국의 파렴치한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관료들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에는 무능했고, 체제를 지켜내는 데는 유능했다.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다. 체제의 나팔수들은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성과 군사적 용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서양 스파이들의 음모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무능을 호도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기 위해 노력했고, 권력자들이 침묵 속에 묻어두려는 이야기를 파헤쳐 드러냈다.


일본 작가인 마루야마 겐지는 국가의 편의에 부합하는 지식이나 교양만이 대접을 받는 세태를 우려했다. 국가는 끊임없이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정부의 시책에 순응하는 국민들을 양민이라 추켜세우지만 국가의 관심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익일 뿐이다.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거 잘못된 거 아닌가'라고 제동 거는 국민"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언제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인물, 위험한 인물이라는 찌지를 붙인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마음이라는 연못에 작은 돌이라도 던져 조그만 파문이라도 일으키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게 어디 작가만의 역할이겠는가.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는 결국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고시했다. 개야 짓거나 말거나 기차는 간다는 식이다. 이 독단적 밀어붙이기가 불쾌한 까닭은 정부와 여당이 과반 이상의 국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이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오연한 목소리로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아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국가 혹은 정부가 사람들에게 국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가르친다는 이 발상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 '올바름'은 다양한 입장과 견해가 부딪치면서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어야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주관적 견해는 편견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국가가 사람들에게 세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순하다.


성경은 신앙적 모범을 보여온 이들의 삶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의로운 자라 평가받는 노아가 술에 취해 하의를 벗고 있는 모습도 그대로 드러내고, 두려움 때문에 자기 아내를 권력자에게 넘겼던 아브라함의 흑역사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격분에 못 이겨 사람들을 때려죽인 모세, 정욕에 사로잡혀 자기 부하의 아내를 범한 다윗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이야기를 생략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실상을 본다. 어두운 기억조차 우리 삶의 일부이다. 삶의 성숙 혹은 역사의 발전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창조적인 변용을 이룰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목록편집삭제

이민창(15 11-07 04:11)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
박승혜(15 11-07 03:11)
항상 생각을 끌어주시고 정리되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 .
삭제
장이영(15 11-11 03:11)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국정화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을 벗겨지는 것 같아 참으로 마음이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