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자비의 희년' 선포를 바라보며 2015년 12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정말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실 건가요?


찬미 예수!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지를 향해 갈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갑니다. 대림초에 하나둘 불을 밝혀나가면서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을 조금씩 내몰아 달라고, 내몰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음을 명심하려 애써보지만 그 시간이 자꾸만 연기되는 것 같아 가끔은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런 믿음을 가차없이 훼손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만들어내고 있는 환등상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음을 일깨우는 데 진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행복의 환상에 이끌린 채 살아가는 이들은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속절없이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는 뱃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가 퇴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테러와 전쟁이 빈발하고 있고, 비교적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유럽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ISIS는 인간이 어디까지 전락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징표로 우리 가운데 서있습니다. 조르주 루오의 판화 '메제레레' 연작이 떠오릅니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는 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후에 그 옆에 'Homo homini Lupus'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말이지요. 모든 생명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생명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악마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혐오를 세상에 퍼뜨리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러한 때이기에 프란치스코 교종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 교종께서 전쟁과 폭력이 일상이 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하신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교종은 방기(Bangui) 대성당에서 '자비의 성년'(The Year of Mercy)의 시작을 알리는 '거룩한 문'을 여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12월 8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하기에 앞서 그러셨다지요? 파격입니다. 하지만 교종께서 그동안 보여주신 행적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 같습니다. 아픔의 땅, 분열의 땅이 아니면 '자비의 문'을 여는 행위의 장엄한 본질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최근에 몇몇 학자들이 개신교회를 떠나 세상을 떠돌고 있는 이들을 일러 '가나안 교인'이라 명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안 나가'라는 말을 뒤집은 조어입니다. 가나안 교인들은 대개 개신교회의 현실에 깊이 절망한 이들입니다. 신앙 자체를 포기한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교회 의사결정 과정의 비민주성, 선포되는 말씀의 편향성, 헌금 강요, 교인들 간의 갈등을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워 잠정적으로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들 중 다수는 좋은 공동체를 만나면 다시 교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가톨릭에 몸을 담는 이들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건강하게 보여서일 것입니다. 


가톨릭이 건강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동안 가톨릭이 보여온 모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일방적 독주에 의해 발생한 사회적 약자들 곁으로 다가서는 사제, 수도자, 수녀, 평신도들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설 땅이 없는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본령이 아니겠습니까? 다수를 점하고 있는 보수적인 개신교회가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서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할 때 일단의 사제들은 지속적으로 그들 곁에 다가섰습니다. 물론 그들도 소수자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교종 프란치스코의 존재와 행보는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교회가 두루뭉술하게 만들었던 복음의 본질을 오롯이 드러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교종은 어떠한 감미료도 치지 않은 채 선포했습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가 좀 더 깨지고 상처입고 더러워지기를 원한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면서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셨지요. 교종이 자신의 성의에 부착했던 노란 리본은 교회가 있어야 자리를 가리키는 이정표였습니다. 전쟁과 폭력을 피해 세상을 떠도는 난민들을 바라보면서 교회가 그들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지요. 진실은 이렇게도 간명하건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핑계를 수없이 만들면서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군말없이 래디칼하게 살아내자는 그 요청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는 결정될 것입니다. 


교종의 가르침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오롯이 일치됩니다. 야훼 하느님은 바로의 전제정치 아래에서 신음하던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느님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 머물면서 인간다운 존엄을 누릴 수 없었던 사람들, 자신들의 그 군색한 처지를 신의 뜻으로 내면화한 채 살고 있던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자라는 떨기나무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던 이들을 찾아와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존엄한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애굽을 떠난 탈출 공동체는 광야에서 새로운 삶을 연습해야 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해체하고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제가 무엇보다 감동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당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부과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들려주시면서 백성들에게 동의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애굽에 사는 동안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살던 이들의 의사를 물었다는 것은 그들을 자기 삶의 주체로 인정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은 특정한 사람들의 뜻만 물은 게 아니라 백성 전체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꿈을 공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과거에 둔 이들이 아니라 실현해야 할 미래에 둔 이들이 되었습니다. 삶이 소명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세상은 '우정과 돌봄'이 바탕이 되는 세상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살 권리가 인정되는 세상,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보여준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특색을 '거룩의 정치학'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정치학'이라는 말은 물론 정치인들의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미시적 권력 관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작고 소박한 향촌 사회에도 마을 공동체에 편입된 이와 배제된 이들을 나누는 일상의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 권력의 특색은 '가름'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거룩과 속됨을 가르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갈랐습니다. 가름의 동기는 물론 배제를 통한 자기 정당성 확보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가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가름에 의해 배제된 이들 곁으로 기꺼이 다가갔고 그들의 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커스 보그는 그러한 예수운동을 '자비의 정치학'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거룩'은 나누지만 '자비'는 통합합니다. '거룩'은 스스로를 중심이라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변방'으로 취급하지만 '자비'는 중심과 변방의 차이를 해체합니다. 어쩌면 차이를 해체한다기보다는 기꺼이 변방이 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인 <복음의 기쁨>에는 유난히 '변방'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더군요. 자기 안위의 자리에서 벗어나 복음의 빛이 필요한 '변방'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모두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몸을 가진 존재의 슬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이웃의 아픔 속으로 나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 받는 이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은 물론 좁은 문입니다. 그렇기에 가려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문에 들어서지 않는 한 영원한 생명을 맛볼 수는 없을 겁니다.


'자비의 성년'이 시작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목표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입니다. 교회는 그런 일을 해왔습니다. 구제사업을 벌이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거룩한 명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승자독식 체제입니다. 요즘 들어 헬조선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헬'이라는 영어 단어와 '조선'이라는 단어의 낯선 조합이 자아내는 허탈함이 느껴집니다. '조선'은 새로운 신분사회의 도래를 암시하는 말일 겁니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자식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회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 속에 담긴 젊은이들의 상실감은 우리 미래를 어둡게 만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는 바로 그런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그런 불의한 사회 구조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목표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가난한 교회'라는 말일 겁니다. 이때의 가난은 물론 중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겁니다. 종말론적인 비전을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의 끝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옛 세대의 지양과 새로운 세대의 도래로서의 종말은 안일한 삶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부유한 삶, 우리의 무제한한 욕망이 충족되는 세상과는 무관합니다. 가톨릭의 형편이 어떠한지는 제가 잘 알 수 없지만, 개신교회가 이렇게도 무기력해지고 세상의 질타를 받는 것은 교회가 가난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부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재물과 하느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both and)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or)의 문제입니다. 부유함과 권력에 집착할 때 교회는 예수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서 예수를 부인하는 역설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스스로를 선물로 내놓으실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존재의 자기 증여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부유함에 대한 유혹에 굴복하는 교회는 더 이상 박해받지 않아도 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치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달콤한 예언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인의 표상>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당신의 후원자를 계속 의식한다면 지식인으로서 사고할 수 없으며, 그저 신봉자나 시종으로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식인만이 아니라 설교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부유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말씀을 훼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교회가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그래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과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들 각자가 삶으로 해야 합니다. 13세기의 성자인 프란치스코는 '무너진 내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는 부름을 받았다지요? 처음에 그는 퇴락한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라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가난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임을 깨달았습니다. '가난 부인'과 결혼한 그를 통해 청신한 기운이 교회에 감돌게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본입니다. 권리를 침해당한 이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 곁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바로 그런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겠지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가톨릭교회의 목표가 현실 논리에 부딪쳐 좌초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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