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이름을 부른다는 것 2016년 07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이름을 부른다는 것


미세먼지가 걷혔던 어느 날 멋진 길벗들과 어울려 남도의 한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급할 것 하나 없는 느릿느릿한 보행으로. 길가에 드문드문 피어난 꽃들과 눈인사도 나누고 잠시 멈춰서서 그 자태에 찬탄하기도 하면서 노량으로 걷는 그 길이 참 평화로웠다. "저건 무슨 꽃이지요?" "하늘말나리예요." "저건요?" "댕강나무꽃이군요." 길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털머위와 바위취, 노루발풀, 방가지똥 등과도 반갑게 눈을 맞췄다. 꽃 이름을 잘 아는 이들과의 산책은 언제나 즐겁다. 꽃 이야기와 식물 이야기를 나눌 때 사람들은 모두 평화주의자가 된다. 경쟁의식도 갈등도 일시 중지다.


동행 가운데 한 분이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어느 날 문득 자연 보호라는 말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을 알면 저마다 귀히 여길 텐데." 그 말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다른 것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무의미한 '몸짓'을 '꽃'으로 변화시킨 것은 호명 행위였다. 정성을 다해 이름을 부르는 순간 호명된 대상과 주체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교도소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이름을 박탈당한 채 번호로 호명되곤 한다. 이름으로 호명하는 순간 그는 존중받아야 할 이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뿐만이 아니다. 언어의 규칙을 바꾸면 사건의 성격도 달리 보이는 법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나찌가 유대인을 멸절시키기 위해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최종 해결책' 혹은 '특별취급'으로 바꿨다. 강제 이송은 '재정착'으로 명명했다. 그런 일 수행하기를 꺼리던 이들도 용어를 바꿔주자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의 직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최종 해결책'이라는 말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가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방패였던 것이다.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는 라르쉬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는 거리에 나앉아 있는 가난한 여인 앞에 멈추어 서고, 그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살아온 내력을 듣고, 자녀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먹는 음식, 만나는 사람, 돈을 쓰는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만남은 우리 속에 변화의 사건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깊이있는 대화를 꺼리는 것은 자기 삶이 이전과 달라질지 모른다는 무의식적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타자와의 소통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낯선 이들을 자기 삶의 평안을 깨뜨리는 잠재적 적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스스로 세운 벽 너머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 부사리처럼 머리를 흔들어 자기 경계에 접근하는 이들을 위협하곤 한다. 다른 한편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배제를 경험한 이들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의외로 자기 혐오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팔레스타인의 인권 변호사이자 작가인 라자 샤하다는 한때 이스라엘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히브리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히브리어를 듣는 것 자체가 견디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정착촌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이 쌓아 올린 분리 장벽으로 인해 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적 경험에서 비롯된 불쾌함 때문이다. 라자는 히브리어가 심문과 소환의 언어, 군인들과 마주쳤을 때나 무례한 병사가 명령을 내릴 때 듣는 언어가 되어 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점령을 살다>).


불통의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힘꼴이나 쓴다고 으시대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자기와 동급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을'의 이름을 정답게 부를 수 있다면 '갑'의 횡포는 사라질 것이다.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서영남 선생은 그곳을 찾아오는 노숙인들을 김씨 이씨 박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번 찾아온 이들의 이름을 묻고 기억했다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다. 이름으로 호명되는 순간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존엄성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해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의 시작이다. 지금 우리 앞에 현전하는 사람의 이름을 정성을 다해 부를 때, 생명을 싹틔우는 봄바람이 살랑 불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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