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웃음 띤 얼굴로 2020년 06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웃음 띤 얼굴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고후1:3-4)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망종芒種 절기에 접어들면서 마치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처럼 덥습니다. 이제 특별히 건강에 유의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준비하다가 놀라셨지요? 예배 직전까지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가, 예배 10분 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대상에 올라갔는데,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방송실 식구들의 당황한 모습을 보면서 큰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배를 중단할 수도 없어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겅중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실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습니다. 방송실 식구들이 비상조치로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하는 것을 보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만 많은 분이 목회실 식구들에게 전화나 문자를 통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하지요? 예배를 마치고 나서도 멍한 상태는 지속되었습니다.

음향장비, 영상장비, 컴퓨터, 화면 송출 장비 등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결합하는지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저 그 당혹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속이 탔습니다. 무엇보다 교우들의 예배를 망친 것 같은 면괴스러움이 컸습니다. 주중에 방송실 식구들이 모여 문제를 점검했습니다. 기계나 시스템의 오류는 아니었고, 네트워크 기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큰 문제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런 차질을 빚게 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영상예배로 전환한 이후에 방송실 식구들이 겪어야 했던 스트레스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예배당에 나와 준비를 하고, 빈틈은 없는지 체크를 하고, 긴장 속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면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 좋은 영상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겠지만 그날 드러난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전화나 메시지를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좋은 뜻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일은 어쩌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생활 방역으로의 전환이 너무 성급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습니다. 꽤 많은 교회가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대면 예배를 재개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 중입니다. 영상예배에 접근하기 어려운 교우들도 꽤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다음 주부터 현장 예배를 시작할까 싶습니다. 교회에 나오든 집에서 예배를 드리든 우리는 하나입니다. 미국 시카고 시가 코로나19 캠페인으로 내놓은 슬로건은 ‘together apart’입니다. ‘함께 그러나 떨어져서’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묘한 언어 조합입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있음을 느끼고, 또 함께 일을 도모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교우 여러분들의 고견을 기다립니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일 겁니다. 우선 복음 자체가 갖는 강력한 힘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지중해 세계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허구의 평화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회는 로마 시민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고, 연약한 이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일깨웠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메시지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로마가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닦았던 길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에는 피식민지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이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가 동쪽으로 군대를 보낼 때 복음은 서쪽으로 진군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초대교회가 견지하고 있던 ‘한 몸’ 의식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 한 세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실재가 된 계기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신자들의 곤경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가야 지방,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는 교우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교우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 소아시아 지방과 유럽에 세워진 교회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의연금을 모았습니다. 넉넉한 중에 낸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어려웠지만, 지체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냈습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잠시 비대면 상황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크신 손이 우리를 감싸 안고 계십니다. 피차 그리워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격려하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히 세우는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 살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지레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겪어야 할 것은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며리 이 상황을 지켜보며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늘 곁에 두고 있는 글 가운데 일부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요즈음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가? 스스로도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꾸만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모든 근심 걱정과 좌절감과 피로감을 다 주께 맡겨 드려라. 그리고 당신의 아내에게, 당신의 형제에게, 당신의 이웃 사람에게, 또는 직장의 동료에게 웃음 띤 얼굴로 대해 보라. 당신의 웃음 띤 얼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멀어 보이던 당신의 기쁨을 드러내 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찾기를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기쁨은 시작될 것이다.

당신이 아직도 그 우울증으로 인해 번거롭다면 잠깐 멈추어 서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언제나 당신 인격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애심(自愛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당신 손아귀에 쥐고 놓지 않으려는 그것을 하나님께 봉헌하라. 그런 다음에 자신의 일을 돌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찾아주는 데로 눈을 돌려라.”(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89, 83쪽)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우리를 좋아하고 기뻐해 주는 신앙의 벗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습니다. 힘겨운 일상 가운데 빚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면 서슴없이 들려주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귐 가운데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6월 13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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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교인(20 06-13 08:06)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에 많은 치유와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행함이 더해졌습니다.

폐지 주우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손 소독제와 마스크, 딸기도 드리고

여름인데도 겨울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에게 옷을 4벌 사주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께서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좋은 말씀으로 많은 분들께 선함을 행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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