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한국 개신교, 희망이 있는가? 2015년 08월 19일
작성자 김기석

 

 한국 개신교, 희망이 있는가?


"교회는 사실을 인식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전능한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전혀 다른 말, 인간적인 말, 무력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늘 참된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된 계명만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시다" (에버하르트 베트게, <디트리히 본회퍼>, 복있는사람, 김순현 역, p.402)


선교 초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계몽의 주체를 자처했던 기독교가 이제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거나, 사회는 진보하고 있는 데 교회는 제자리걸음 혹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배타성, 공격적 선교, 헌금 강요, 증오의 선동, 반공 숭미주의, 목회자들의 전횡, 세습이라는 사실은 개신교의 전락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반증한다. 더욱이 사회의 온갖 비리와 추문에 연루된 사람 가운데 개신교인이 많다는 사실이 이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광장에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고 북을 치고 발레를 하고 부채춤을 추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마치 외계인을 본듯 낯설어한다. 비록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들은 역설적으로 개신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세상 도처에서 묵묵히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개 대중의 시선을 비켜난 자리에 있다.


해방 이후의 기독교를 반성적으로 평가해보는 게 이 글의 목표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간략하게나마 한국개신교회의 뿌리를 조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변화의 맥점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열망이 고조되고 있던 구한말, 기독교는 근대적 가치를 제시해 주는 첨병 역할을 감당했다. 유교적 가치에 붙박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기독교라는 창을 통해 확장되었던 것이다. 왕실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세워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병원을 세워 의료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치유해주었다. 선교사들은 지혜롭게도 조선인들에게 먼저 낯선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선교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회 지도층 역시 기독교를 종교로서가 아니라 근대적 가치를 전해주는 사상으로 수용했다.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와 시대적 혼란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은 피폐하게 변하고 있었는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나라는 그들을 지켜줄 의사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깃발이 꽂혀 있는 교회에 자신들의 가산을 의탁함으로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로써 교회는 보호자로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1907년에 벌어진 평양대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러일전쟁의 참화가 빚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엉겅퀴와 가시덤불 밖에 없는 법이다. 전쟁은 끝났어도 민중들이 겪어내야 했던 참담한 궁핍은 지속되었고, 군대로부터 겪은 폭력의 기억은 쉽게 치유될 수 없었다. 내면에 상처가 있는 이들은 타인들에게 너그러울 수 없었다. 상호부조의 원리 위에 세워졌던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울울한 마음을 안고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고, 어느 순간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다. 이 체험이 도화선이 되어 도덕적 대각성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사람들은 열광적 분위기 가운데서 과거의 잘못을 참회했다. 이로써 내면의 치유가 이루어졌고 이것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사건이었지만 사회 구조의 문제를 내면의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사회변혁보다는 개인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는 개신교회의 태도가 형성된 것이다.


일제시대과 한국전쟁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태도는 지속되었다.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은 16명이었음을 자랑하지만, 그 사건 이후 기독교는 사회운동의 거점 역할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일제 식민당국은 사회 구조의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개인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교회를 위험시할 이유가 없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크게 위협했다. 신사참배를 놓고 기독교회는 갈라졌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수난의 길을 선택했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현실에 순응했다. 수난의 길을 선택한 그 소수자들의 믿음은 대개 보수적이었거나 근본주의적이었다. 그들의 저항은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종교적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감내한 수난과 순교의 기억은 도덕적 지분으로 축적되었고, 그것은 해방 이후에 일종의 권력으로 바뀌었다.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이들이 확고히 교회의 주류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예언자적 음성은 잦아들었고, 개인주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이들은 그 수치의 기억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들을 향해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해방 이후의 분단 상황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에 머물던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그들은 수치스러웠던 신사참배의 기억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받은 박해의 기억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남쪽으로 내려와서도 지역색을 띤 교회를 설립했고, 그 교회들은 복음의 내용 속에 반공주의를 끼어넣었다. 교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악마화하고 그들에게 증오를 집중시킴으로서 자기들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려 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여 반공주의와 숭미주의는 교회 안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또한 기독교인들의 기복신앙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폐허로 변한 땅에서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가야 했고,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의 가호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현세적 복락에 집중되었다. 의식주 문제 해결과  가족들의 무탈함을 위해 눈물로 기도실 바닥을 적시는 이들이 많았다. 가슴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잊기 위해 그들은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시대적 혼란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약화되었다. 반면 성령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이 불일듯 일어나면서 신흥종파들과 이단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다. 그들의 행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기독교는 비이성적이고 열광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의 전제 정치 아래서 신음하던 히브리들의 해방 사건을 전해주는 출애굽기는 지배자-피지배자가 갈리는 세상을 넘어 평등 공동체의 꿈이 어떻게 실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시련을 세상의 모순을 품에 안고 그것을 아름답게 넘어서라는 소명으로 이해하여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불렀다. 1세기의 지중해 세계로 확산되어가던 기독교는 '힘이 곧 정의'라는 로마 제국의 잠재적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그 특색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어둠이 지극한 때야말로 참 빛이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 있지 않던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기독교는 그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미군정기를 거쳐 수립된 이승만 정부는 기독교인들이 권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김흥수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제1공화국의 19개 부처 장·차관 242명 중 개신교인의 비율은 38%였으며 이 가운데 각 부처의 장 135명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개신교인의 비율는 무려 47.7%에 달했다" 한다(김흥수, "해방 후 한국전쟁과 이승만 치하의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제566호[2006년 2월], p.206).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막연히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지만 권력과 밀착된 종교가 예언자적 음성을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의 단맛에 취하는 순간 종교는 그 본래성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오도하거나 억압하는 기제로 바뀌게 마련이다. 이승만 정부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소리를 억압하고 부정선거를 기획했을 때에도 교회는 침묵하거나 오히려 명시적 지지를 보냄으로 역사의 흐름을 역행했다. 식자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외국 기독교 기관이 보내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교회는 교육과 사회복지에 많은 공헌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물품들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교회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의 아픔보다는 교회 내부의 사람들의 아픔에만 치중함으로써 기독교는 배타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초월적인 비전을 통해 역사를 견인해야 할 기독교가 안으로 잔뜩 움츠리고 만 것이다.


진보적 기독교의 등장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마냥 현세적 복락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주류에 속하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기복적인 신앙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일군의 신학자들이 나서서 서구신학에 매몰되어 있던 신학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한국이라는 토양 속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어떠한 형태로 열매맺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토착화신학'이 대두되었다. 한국의 전통사상과 서구 신학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서구신학의 이론 틀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이다. 그러나 토착화신학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기독교의 사유 지평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가 역사의 무대에 몸을 드러내고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을 시작한 것은 한일국교 정상화 논의가 진행되던 때였다. 군사 정권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던 국교 정상화는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두루 퍼졌고, 제1공화국 이후 친정부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던 기독교계 일부가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 '아니오'라고 말한 것이다. 파장은 미미했지만 그 사건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등장을 예비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 연장을 위해 밀어붙이려던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1969년 8월 15일자 주요 일간지에 <전국의 신앙 동지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삼선개헌 반대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계는 즉각 <개헌문제와 양심 자유 선언>이라는 성명서를 내면서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일러 순진하고 선량한 성도들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진보와 보수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로 말미암아 첨예한 갈등 상황 속에 빠지게 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은인자중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어놓았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한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불꽃 속에서 산화했다. 학생들이 먼저 깨어나기 시작했고, 관념적인 강단신학에 붙들려 있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 절규에 화답하기 시작했다. 민중신학은 전태일 분신사건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교회운동으로 이어졌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신학의 지평선 위로 새롭게 대두되게 되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억압적인 정부에 대한 반대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신앙은 더 이상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보수 기독교의 반격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추진했던 근대화 기획에 확고히 편입되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음성은 보안법과 긴급조치를 통해 억압되었다.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 주류 기독교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 예언자적 음성을 발하지 않았다. 교회는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할 때 그 구조적 문제에 도전하기보다는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데 집중했다. '적극적 사고방식' 담론이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교회 안에 울려퍼졌고, '잘 믿고 복 받자'는 번영신학이 반성조차 없이 교회를 파고 들었다.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값싼 은혜가 한국교회를 사로잡은 것이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 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 떨이로 팔아버린 위로요, 떨이로 팔아버린 성례전이다. 값싼 은혜란 교회의 창고에 무진장 쌓여 있어서 언제나 손쉽게 무제한으로 제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그런 은혜는 대가나 노력 없이 얻는 은혜다. 계산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영주증만 제시하면 모든 것을 언제든지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은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2010년 10월 15일, p.33)


대형교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주의'라는 덫에 확고히 포획되었다. 누구도 그 덫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는 순간 본과 말은 뒤집혔고, 목회자들은 암암리에 자본주의적 자기 증식의 논리에 편입되고 말았다. 겨자풀 같은 사람들이 어깨를 겯고 세파를 견디며 서로의 품이 되어주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교세 확장의 욕망으로 치환되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던 예수 운동은 사람들에게 비주체적 순종을 강요하는 교회운동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5:25)라는 말로 요약되는 예언자들의 선포는 모래 속에 스며드는 물처럼 사라지고 권력에 잇대 보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80년 8월 6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한 조찬기도회는 한국교회사의 수치라 할 것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모여 그의 등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분식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통해 희생된 이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교회는 그 책임자에게 면벌부를 제공해준 것이다. 언제라도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풍부하게 동원할 수 있는 교회가 늘어나면서 개신교회 지도자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노골화되었다. 콘스탄틴적 기독교가 이 땅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88년 2월 29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통일위원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선언"은 보수 기독교 진영을 크게 격동시켰다. 이 선언은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삼자면서 '7·4남북공동성명서'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인도주의와 통일논의의 민주화 등을 추가하여 통일 5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었을 때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하며, 남북한의 군사력 감축과 핵무기의 사용금지와 철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동안 정부가 독점해왔던 통일논의를 다각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는 이 선언에 크게 반발했다. 더 이상 KNCC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 이들은 1989년 말에 '한국 기독교 총연합'(한기총)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기근에 허덕이고 있던 북한주민을 위한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사람들 속에 봉사하는 단체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정부는 음으로 양으로 이들의 활동을 후원했다. 이로써 사회 비판에 치중하는 KNCC와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한기총에 속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보수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터져나올 때마다 광장으로 달려나와 보수적 가치와 친미 반공의 보루를 자처했다. 성조기를 흔들고, 영어로 기도하고, 바퀴 달린 십자가를 끄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빨갱이 담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세상의 모든 분열의 담을 허무는 예수의 십자가가 오히려 증오와 배제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현대판 십자군을 자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12세기의 십자군에게서 일종의 허무주의적인 요소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2007, 교양인, 435-6쪽)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목회자들의 존재야말로 현실 기독교회 앞에 놓인 암초들인지도 모르겠다. 잊혀질만 하면 터져나오는 목회자들의 비리와 성 추문 사건은 본(本)을 내던지고 말(末)에 집착했던 교회가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표들이다.


희망의 조짐은 있는가?

그렇다면 개신교회는 이제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절망의 조짐이 더 많지만 희망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 주류 집단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면서 옹골차게 자기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었다. 교회 성장주의 담론을 해체하면서 작은 교회 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을 희망의 조짐으로 갈무리해두고 싶다. 작은 교회 운동은 물론 규모의 작음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진실한 공동체성을 유지해가면서 일상의 삶 속에 예수 정신을 구현하기에 적절한 규모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뿐이다. 작은 교회들의 유기적 연대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이며, 보편적인' 교회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는 촛불교회도 생겼다. 2009년 1월 20일에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일군의 진보적 목회자들이 그 현장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된 촛불교회는 이후에도 꾸준히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현장을 찾아가 그들의 곁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개신교회가 비난의 표적으로 변한 이 시대에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가를 가리키는 기표로 서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찾아가는 교회야말로 예수 운동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확고히 포섭된 이 나라에서 기독교는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기복주의 신앙을 부추기고 번영의 신학 담론을 통해 성장하던 교회 시대는 이제 끝났다. 로마 제국의 폭압 아래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했던 예수의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이들,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신에 대한 경외임을 삶으로 입증하는 이들이 출현해야 한다. 


가톨릭의 교종인 프란치스코의 존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전 세계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자기들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는 프란치스코의 존재를 통해 삶의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과감히 선언했다. 그는 또한 불의와 어둠을 폭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마피아들을 향해 '그대들은 파문되었다'고 선언하고, 전쟁을 기획하고 획책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위선적이라고 꾸짖는다.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문제에 대해 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마땅한 태도라도 말한다.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말이다. 그는 다만 해야 할 소리를 했을 뿐이다. 종교적 권위의 의상 뒤에 숨어서 모호하게 말하지 않고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언어로 이 시대의 어둠을 드러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참 종교인의 모습을 본다.


해방 이후의 개신교회는 부침을 거듭해왔다. 이제 하나님의 키질이 시작되었다. 쭉정이는 날려갈 것이고 알곡은 남을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는 다시금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외쳤던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씨알의 소리>, 2015년 7-8월호(통권 제2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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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5 08-21 05:08)
말씀전하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자고 인도자가 청할때마다 제 기도는 한가지입니다.
주의 종을 깨끗하게 하소서 순전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마음이 주님앞에 깨끗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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