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마태산책5 2015년 08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본문 / 마21:23-46


무엇을 지키려는가?

성전 정화 사건을 성전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뭉쳤다. 그들은 예수의 운명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고 묻는다. '이런 일'은 성전에서 매매 하는 이들을 내쫓고 상인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 것을 가리키는 말일 테지만 예수의 사역 전체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무슨 권위'라는 말 속에는 '전문가주의'의 음험한 그림자가 담겨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면허증' 혹은 '학위증'이 있느냐는 말이다. 예수는 그 물음에 즉답을 피한 채 다른 물음으로 응답한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보다는 권력의 들큼한 맛에 길들여진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질문이다.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었다면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산을 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는 힐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면 그를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중간한 대답을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이로써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자기들의 권력이었음이 드러났다.


예수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더니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고는 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로 이르자 "싫소이다"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 예수는 이 이야기 끝에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으냐". 답은 물론 둘째 아들이다. ('새번역성경'에서는 이 두 아들의 태도가 뒤바뀌어 있다. 싫다고 말한 후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간 것은 맏아들이었다. 두 번역이 이렇게 다른 것은 서로 다른 사본을 번역 텍스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이야기 끝에 단호한 결론을 내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경멸해마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현실 앞에 겸허히 마음을 열었다는 말이다. 예수는 이처럼 안다 하는 자부심, 경건하다는 자부심이 오히려 진리와의 진실한 대면을 가로막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포악한 농부들

예수는 또 다른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자격 상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는 거기에 필요한 부대 시설을 다 갖췄다. 그후에 그는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다. 열매 거둘 때가 되자 자기 종들을 보내 세를 받아오도록 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농부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저항했다.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쩌면 이런 일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 주인은 당황스러웠지만 처음보다 많은 종들을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며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농부들은 오히려 그를 제거하면 자기들이 그 유산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은 후 죽이고 말았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친 후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 하고 대답한다. 


흔히 이 이야기는 구원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로 옮겨졌다는 뜻으로 해석되곤 한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옮겨짐'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이 이야기 속에 담긴 날카로운 현실 비판을 읽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포도원에서 혹은 그 밖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다툼이다. 로마에 부역하면서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로 인해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땅이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이것은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에 겪은 민중들의 뼈저린 경험이기도 했다. 예수는 그런 피 흘림이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는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도자연하는 이들에게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이를 오히려 역사 발전의 초석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낸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신비가 아니던가.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는 것이다. 화려함 속에서 폐허를 보고, 연약한 것 속에서 가장 강한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비루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이 자기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더욱 적대시하게 되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이여!






















청함을 받은 이는 많으나

본문 / 마22:1-22


무서운 하나님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이 있었다. 예고한 날이 되자 임금은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재차 초대했다. 하지만 한결같이 거부했다. 임금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내면서 청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한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4b).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청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어떤 이는 자기 밭으로, 또 어떤 이는 자기 상업차 가고, 남은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과연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의혹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잠시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하자. 정중한 초대와 완강한 거절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오기를 싫어하였거늘'이라는 구절과 '돌아 보지도 않고'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완강한 거절은 마침내 종들에 대한 능욕과 살해로까지 이어진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잔칫날은 심판의 날인 동시에 해방의 날이다. 죄에 사로잡혀 언구럭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강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숨죽인 채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기쁨의 날이다. 이사야는 그 아름다운 잔칫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벗기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백성들이 세상 도처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주신다고 선언한다(사25:7-8, 새번역의 요약). 그러나 지금 비유에 언급되고 있는 잔치는 그렇게 느긋하고도 평화스러운 결말로 향하지 않는다. 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른다. 당황스럽다. 비유를 듣는 이들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분노하는 하나님이라니! 마태는 왜 이렇게 하나님을 무섭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마태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후 70년에 벌어진 일을 잘 안다. 로마 군인들이 평화의 도성이라고 불리우던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다.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정체성은 흔히 타자들과의 구별을 통해 형성되곤 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귀의하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자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성전의 파괴를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생기게 되었다. 본문은 이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임금은 종들을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지시한다. 종들은 길에 나가서 만나는 이들을 다 데려왔다. 악한 자와 선한 자의 구분은 없었다. 마침내 혼인자리가 다 찼다. 이것은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암시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잔치자리에 나온 임금은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대노한다. 그래서 종들에게 그 사람의 수족을 결박한 후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명령한다. 이 대목은 매우 당혹스럽다. 초청할 때는 언제이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다니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그래서 혼인잔치에는 손님들이 입을 예복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가 입기를 거절한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예복은 신자들의 선한 행실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초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

바라새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로 사로잡기 위해 헤롯 당원들과 더불어 음모를 꾸민다. 그들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 하고 묻는다. 세금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여서 어떤 대답을 하든 예수는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이 되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 감정을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것이 함정 질문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지만 그들의 질문에 응대하신다. 세금을 낼 때 사용하는 돈을 가져와 보라 이르신다. 사람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신다.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한다. 데나리온의 한 면에는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두상이, 그리고 다른 한 면에는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시며, 폰티펙스 막시무스이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최고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권력이 신성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로마 황제들은 신 혹은 신의 아들을 자칭했다. 


마침내 예수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답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 현실 국가 체제 속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처신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지만, 이 말 속에 중의적 의미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가이사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강렬한 메시지 말이다. 과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늘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신앙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악의에 찬 질문 앞에서

본문 / 마22:23-46


산 자의 하나님

예수에 대한 기존 체제의 공격이 참으로 집요하다. 이번에는 사두개인이다. 그들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인 사독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율법 해석의 권위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다. 사제 계급을 대물림하면서 획득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대교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에 진출한 이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보수적인 태도는 생존의 위기 혹은 삶의 절박함과 절연된 현세적 삶의 조건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성전 체제를 뒤흔드는 예수라는 사나이의 존재를 위협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나름대로 정교한 함정 질문을 마련해왔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답게 우리가 흔히 형사취수법 혹은 수혼제(嫂婚制, levirate)라 이르는 가르침을 들고 예수를 시험한다. 어느 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죽자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고, 결국은 칠 형제 전부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가 여자도 죽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극단적인 예이다. 이런 가정 하에 사두개인들은 묻는다.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8). 그들은 속으로 예수를 논리적 곤경에 빠뜨렸다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대답은 그들의 허를 찌른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9-30). 율법 전문가를 자처하는 그들이 실상은 무지한 자들임을 넌지시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한 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선조들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어떤 논리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미 무덤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위에 인용한 출애굽기의 말씀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이것은 그들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는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속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죽음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듯이 모든 관계의 종언이 아니다. 


논리가 아니라 삶이 중심이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찾아왔다. 그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는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평행본문(막12:28-34, 눅10:25-28)은 질문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우호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음을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613개에 이르는 율법 조문들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짜고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음으로써 자기들의 논쟁 가운데로 예수를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 계명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계명의 알짬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거짓이다. 또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학적 논의와 고백은 공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서슴없이 대답한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일종의 변형된 모순율이다. 이로써 예수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논의가 방향을 잃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던 것은 '다윗의 자손인가 아닌가'였다. 혈통이 중요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폐적인 논리에 갇힘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태 역시 예수의 족보(1장)를 다루면서 그를 다윗의 계보에 편입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미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폈는데 밖으로 나가 봄을 만끽하지 못한 채 달력의 날짜만 헤아리는 가련한 이들이 많지 않던가.


한 가지를 더 언급해야겠다.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을 마감하는 구절은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33)이다. 여기서 '무리'가 지칭하는 이들을 특정하는 것이 쉽진 않지만 그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람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을 마감하는 구절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6)이다. 예수는 완벽하게 승리했다. 하지만 맞수들의 적대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화 있을진저

본문 / 마23:1-36


우상화는 죽음이다

예수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놓고 가르치려 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라 이르신다. '모세의 자리'는 어떤 권위의 상징과도 같은 자리이지만,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3a). 말 혹은 고백과 행실의 불일치는 어느 시대든 종교인들의 원죄와도 같다. 옛 사람은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고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다고 가르쳤다.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씀은 공허하다.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던 것은 말씀과 삶의 틈 없는 일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도자연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되 정작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은 일종의 멍에인 동시에 지배의 도구이기도 하다. 


예수가 비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삶을 요약하면 '자기 확장 욕망'과 '사회적 존경 추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인들은 이 신랄한 비판 앞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새로운 윤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한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8-10). 9절에 나오는 '아버지'는 종교적 권위자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맹자는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랍비', '아버지', '지도자'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순간 그의 영혼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한다. 시인 정현종은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그저 좋아하고 그저/사랑하고 사뭇/찬탄은 하리로되/神格은 우습지."라고 노래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부정한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들, 스스로 우상이 되려는 사람들, 그리고 대중들의 환호를 즐기는 이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 있다. 


13절부터 36절까지는 마치 산상수훈의 말씀이 그러하듯 예수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하신 특정한 주제의 말씀을 한 군데 모아놓은 것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불행선언이 일곱 번 반복된다. 불행선언의 대상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소경된 인도자들이다. 그들의 삶의 특색은 '외식'이다. 외식은 '겉꾸밈' 혹은 '면치레'를 뜻하는 동시에 요구받은 삶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이다. 그런데 마태는 왜 이 단락에 그들에 대한 비판을 집중한 것일까? 그것은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의 주도 세력이 된 그들과 논쟁을 벌이며 자기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던 마태 공동체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언제나 옛 세계의 파괴와 더불어 시작되는 법이다.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13절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 현실을 지적한다.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않지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떠올리게 된다. 주님은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시겠다면서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두 세계를 매개하는 것은 더 이상 낡은 지도력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이 마태의 전언이다.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개종의 길로 인도한 후에 자기들보다 더 못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이들(15)이 있다. 믿음의 길에 접어든 후에 더욱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으로 변한 이들이 많다. 그릇된 가르침에 경도된 탓이다. 스스로 시비곡직을 가릴 줄도 모르고 영적인 분별력도 없어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16-22)이 있다.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름받은 이들은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구도정신을 가지고 날마다 정진하지 않는 이들은 소경된 인도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율법이나 교회 관습이 요구하는 종교 행위는 철저하게 준행하지만 율법과 복음의 근본인 '정의, 긍휼, 믿음'은 버리는 사람들(23-24) 또한 많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찬 사람들(25-26)도 있다. 자기 닦음 혹은 수행이 제거된 종교는 사람들을 진지한 성찰로 이끌지 못한다. 그래서 믿는다는 허명만 있지 삶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회칠한 무덤 같아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사람들(27-28)로 인해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고 있다.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도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불법을 덮어버리려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는 공신력을 잃고 있다. 선지자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자기들 같았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지만 정작 자기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서슴없이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사람들(29-36)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만약 성서의 예언자들이 오늘 이 땅에 온다면 그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시대는 변하였어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역사의 비극이다.




















환난 예고

본문 / 마23:37-24:31


아, 예루살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평화의 도성이어야 할 예루살렘이 오히려 폭력의 땅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단한 일상을 뒤로 하고 찾아가던 순례의 중심지가 배역(背逆)의 상징이 되었다. 열정이 자기 중심주의와 결합할 때 종교는 일쑤 폭력과 타자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 두려운 예고이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이런 탄식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서로 가리켜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4:2). 제자들은 성전의 크기와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예수는 미구에 닥쳐올 그 허망한 무너짐에 주목한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는 스러지게 마련이고, 그 신전은 퇴락하거나 무너질 수밖에 없다. 모래 위에 세운 집 이야기 끝에 예수가 하신 말씀이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어느 때에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며 그 징조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후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66년부터 70년까지 지속된 유대-로마 전쟁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전쟁은 종말의 전조로 새겨졌을 것이다. 전쟁은 일상의 모든 질서를 무너뜨려 세상을 혼돈으로 되돌린다.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이 고조되고 기근과 지진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불법이 성하게 되고 사람들의 사랑도 식어진다. 바르게 살려는 이들이 오히려 환난을 당한다. 마태는 그런 전쟁의 상흔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게 미혹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이른다. 모든 것이 황폐하게 변해버리는 때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줄 어떤 권위를 찾는다.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그래서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24:4).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24:6).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4:13). 환난의 시간은 막연한 고통의 시간이 아니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할 유보의 시간이다. 심판인 동시에 해방인 '끝'은 그 모든 일이 수행된 후에 다가온다. 이것은 왜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지를 묻는 이들에 대한 마태의 답변이다. 


시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15절부터 28절까지 전개되는 이야기도 유대-로마 전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은결든 사람들의 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는 말은 티투스의 군대가 성전을 점령한 후에 성소에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바친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16절부터 20절까지는 점령자들에게 능욕 당하지 않기 위해 성을 탈출하는 난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특히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 아이들에게 가혹하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구절들이 과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태는 이것을 과거 사건이 아니라 미래에 닥쳐올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이 모든 상황을 '큰 환난'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하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감싸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22)는 말씀은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들에게 희미한 희망의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이 단락에서 마태는 다시 한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호릴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지 않은 사람일수록 표적과 기사에 집착한다. 일상 속에 깃든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일수록 미혹하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예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그 영광의 시간을 간과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마태는 단호하게 말한다.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4:26-27). 환난의 때가 지난 후에 그날은 도둑처럼 닥쳐올 것이다. 그날은 우주가 몸살을 하듯 흔들리는 날이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9). 그 때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세상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택하신 자들을 모으실 것이다. 묵시문학적인 이 단락을 통해 마태는 어떠한 시련과 환난이 닥쳐온다 해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굳건히 서라고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괜히 허둥거리면서 일상의 삶을 소홀히 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본문 / 마24:32-51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설렘과 희망이 될 때도 있지만 공포와 불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미래를 자기 통제 하에 둘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한다. 현대인들은 필사적으로 재물을 모으거나 보험에 가입한다. 예측 가능성이 늘어날수록 삶은 안정적이다. 종말의 징조가 속속 드러나는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이들에게 예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준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그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32-33)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은유로 사용되곤 했다. 무화과나무는 다른 식물들에 비해 늦게 잎사귀가 나올 뿐만 아니라 꽃이 무화과 주머니 속에서 피기에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한다. 무화과나무에 새 잎사귀가 나오면 사람들은 여름이 다가왔고 수확의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핵심은 '알아차림'이다. 예수는 앞서 언급한 종말의 징조가 곳곳에 나타나면 인자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4). '이 세대'라는 구절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옛 세대를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날의 급박성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른다.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날을 바라보는 이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예수는 노아의 때를 예로 든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사람의 생각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 아파 하셨다(창6:5-6). 그리고 사람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작정하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8-39). 먹고 마시는 것,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니다. 관습적인 삶에 안주한 채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들의 무감각 혹은 둔감함을 지적하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징조는 늘 주어진다. 다만 징조를 징조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그날은 가름 혹은 분리의 날이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40)이다. 맷돌을 돌리는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인이 밤 몇 시에 도둑이 올지 미리 안다면 주인은 방비를 철저히 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인자 오심을 예비하라니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예수는 충성된 종과 악한 종 이야기를 들려준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45). 새번역은 이 단락의 첫 부분을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로 옮겼다. 종을 뜻하는 단어 '둘로스'(doulos)는 신약에서 주님께 대한 완전한 충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이 종에게 위임한 일은 '청지기'의 역할인데 마태가 굳이 둘로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종은 주인이 위임한 일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종은 복 있는 사람이다. 주인의 신뢰가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마태는 그런 이를 가리켜 '악한 종'이라 한다. 악한 종은 무가치한 종 혹은 주인에게 해를 입히는 종이다. 그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 예단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봉사를 위해 맡겨진 직무를 권력으로 재빨리 치환하고 만 것이다. 권력은 쾌락보다 달콤하다지 않던가. 시인 정현종은 "권좌權座"라는 시에서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 않는 권좌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렇게 노래한다. "권좌는 저주의 수렴이요/권좌는 치욕의 원천이며/권좌는 강력한 오점이다". 진실한 신앙은 지배의 포기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소의 제일 높은 음인 태㳲를 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장 낮은 곳에 두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고 한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악한 종은 자기 분수를 망각했다. 그는 자기 동무들을 때리고 술친구를 불러 먹고 마셨다. 그러나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50)이 온다. 그리고 그의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51). '엄히 때리고'라고 번역된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둘로 나누다'이다. 새번역은 이 단어의 폭력적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 종을 처벌하고'로 번역했는데, 공동번역은 '그 종을 자르고'라고 번역했다. 원문의 뜻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주인의 격노를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인가? 악한 종인가?





















슬기로운 처녀들

본문 / 마25:1-13


'新婦'는 서정주 선생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시이다. 시는 다짜고자 이렇게 시작된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그런데 그만 신랑이 오줌이 마려워 급히 달려나가다가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리고 말았다. 신랑은 제 신부가 음탕하여 그 새를 못 참아서 자기를 붙잡은 거라 생각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길로 집을 떠나고 말았다. 4-5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그 신부집 옆을 지나가던 신랑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 그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 결말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수 십 년을 앉은 자세 그대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정한,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신랑이 안쓰러움에 신부의 어깨를 보듬는 순간 마치 오랜 서러움이 풀린 듯 폭삭 재로 내려앉고 마는 그 소멸, 이 시를 본 순간부터 초록과 다홍이 곱게 어울린 한복을 볼 때마다 여성들이 겪어왔던 아픔과 서러움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인생은 온통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은 '기다림의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삶은 기다림의 시간들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인지도 모른다. 삶이 힘겨운 것은 기다림의 내용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이 아름다운 것은 뭔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을 반영하고 있다. 신랑은 정혼한 처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신랑이 집에 도착하는 순간 미리 기다리고 있던 벗들이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면서 결혼식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곤 했다. 비유에는 열 명의 처녀가 등장한다. 그들 가운데 다섯은 슬기롭고 나머지 다섯은 미련하다. 모두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오직 다섯 처녀만 기름을 준비했다.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믿음', '사랑', '선한 행실'…. 비유의 강점은 그 개방성에 있다. 하나의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은 비유를 사실로 바꾸려는 조바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접한 대답은 얻을 수 있다.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기름'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삶 혹은 존재 전체를 이르는 말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신랑이 돌아오기까지는 처녀들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신랑의 도착이 자꾸 지연되자 그들은 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밤중, 예기치 않은 시간에 신랑이 도착했고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녀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매정한 거절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꼭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 차라리 기름을 나눠주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불편함이 있다면 함께 겪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공감이란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 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그런 인간적 정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엄정한 삶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기름은 나눠 쓸 수 없다. 누구도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렇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마태는 천국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차단하고자 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로 달려가지만, 신랑의 도착과 함께 혼인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고 문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 이 대목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는 말씀과 상응한다. 많은 이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감격하지만 그 믿음은 신실한 삶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고백은 공허하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두 번이나 거절당한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9),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 그 거절의 쓰라림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대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8:12, 22:13, 25:30)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예수는 다시 한번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다.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이들은 기다림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막연히 그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의 내용을 선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 기다림은 진실한 것이 된다. 독일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은 "매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라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영원의 빛 속에서 재구성할 때 삶은 아름다워진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본문 / 마25:14-30


착하고 충성된 종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게 되었다. 엄청난 부자였던 그는 자기 재산을 현금화하여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종들에게 맡겼다. 종들의 재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대략 일용노동자의 20년 수입이라고 보면 된다. 평행본문인 누가복음(19:11-27)은 주인이 열 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은화 한 므나 씩을 맡겼다고 말한다. 한 므나는 약 100 데나리온 정도에 해당된다. 누가복음 이야기가 훨씬 있음직한데 마태는 왜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달란트라는 단위를 쓴 것일까? 아마도 종들에 대한 주인의 신뢰가 그만큼 확고했다는 것과 그들에게 위임된 일이 매우 값진 것임을 과장되게 일컫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19:13).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런 지시가 없다. 맡기고는 표표히 떠날 뿐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 말하지 않는다. '맡김'과 '떠남' 사이에 어떤 유보도 없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마찬가지였다. '위임'과 '수행' 사이에 어떤 망설임도 없다. 주인의 태도와 종들의 태도가 유사하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다른 둘과 달랐다. 그는 즉시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마침내 주인이 돌아와 결산의 시간이 되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원금은 물론이고 장사를 통해 얻은 다섯 달란트의 수익금을 주인 앞에 내놓았다. 본문은 그들이 무슨 장사를 해서 그렇게 큰 돈을 벌었을까 하는 독자들의 호기심은 가볍게 외면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 뿐이다. 주인은 그를 아낌없이 칭찬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충성스러운 그에게 주어진 보상은 더 큰 권한의 위임과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참여하다'라는 단어는 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원금과 더불어 두 달란트의 수익금을 주인께 바친다. 그도 역시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과 똑같은 칭찬을 받는다. 주인은 두 종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수고한 것에 대해 칭찬할 뿐, 남긴 액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악하고 게으른 종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두었던 한 달란트를 가져와 주인께 드리며 말한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그는 자기가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기지 못한 나름의 변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주인의 모질고 탐욕스러운 성격이 자신을 위축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라는 자의적인 판단 속에는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멸시가 담겨 있다. 주인이 그에게 맡긴 달란트는 그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주인이 맡긴 것을 잃어버리면 가혹한 징벌을 받을 거라는 예단이 그를 위축시켰다. 


주인이 가혹하고 모진 분이라는 그의 판단은 주인의 실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주인의 이미지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그릇된 이미지는 그릇된 관계를 만들어낸다. 지금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지릅뜬 눈으로 그 백성을 지켜보다가 사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가차없이 벌을 내리는 분으로 형상화한다. 새로운 율법주의가 아닌가? 그야말로 자의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지 않다.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그 종을 엄히 꾸짖는다. 주인의 성격을 그렇게 판단했다면 달란트를 땅에 묻을 게 아니라 이자놀이하는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종을 일컫기 위해 사용된 단어 '악하다'는 도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나쁜, 해로운, 무가치한'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게으르다'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다, 주저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비유가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본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망설임과 주저함 속에서 맡겨진 사명을 방기함으로써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달란트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지식(마13:11-12)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과 하늘 사이를 매개하는 권세를 주셨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선포하고 확장하는 일이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편이 낫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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