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 2015년 09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


최근에 신문에서 본 몇 장의 사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아일란 쿠르디, 시리아 내전을 피해 부모와 두 살 위의 형과 더불어 난민선에 올랐던 세 살배기 아이다. 그는 터키 해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붉은 색 티셔츠에 감청색 반바지를 입은 아일란은 앙증맞은 운동화를 신은 채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아내와 두 아들을 잃어버린 아일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다며 흐느꼈다. 왜 안 그렇겠는가?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가만가만 움직이던 아일란의 모습은 굳어진 인류의 가슴을 두드리는 하늘의 북소리였다.


또 한 장의 사진. 터키에서 보트를 타고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상륙한 시리아 난민이 두 팔을 벌린 채 자갈투성이 해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벅찬 감격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뒤에서 허리를 굽힌 채 그를 부둥켜 안고 있는 이 역시 울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사지에서 벗어난 감격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배회하게 만들었는가? 비록 넉넉하진 않아도 가족들과 더불어 단란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그들의 소박한 꿈은 전쟁의 포연 속에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지금은 살아 남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견디며 살아내야 할 고단한 미래일 뿐이다.


또 다른 사진 한 장은 독일 뮌헨역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를 담고 있었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제 막 도착한 시리아 난민들 앞에는 '난민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펼침막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민들의 얼굴에는 자기들을 두 팔 벌려 맞아준 독일인들의 우의에 대한 감동이 새겨져 있었다. 물론 난민 유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독일 사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민을 돌보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만 독일은 그 부담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태도를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베를린에 본부를 둔 시민단체 '난민 환영'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쟁을 피해 떠나온 이주자들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하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꽤 많은 이들이 자기 집에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인구 33만 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에서는 한 유명 작가의 제안에 따라 무려 일 만명의 시민들이 난민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했다고 한다. 예기되는 어려움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박한 처지에 빠진 이들을 보며 매몰차게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유대인 사상가인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인간됨은 자족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함을 통해 구성된다는 말일 것이다. 


참 사람됨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삶으로 응답함을 통해 발현된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수백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와 있다. 국제법상 난민의 지위를 획득한 이들은 많지 않지만 대개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주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가운데 머물고 있는 난민들 혹은 거류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근원적 슬픔의 자리에 서면 타자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타자를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신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난민들은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 문화의 성숙도를 묻는 물음표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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