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40-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2015년 09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평안하신지요?

모처럼 맞은 휴일입니다. 라디오에서는 가볍고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무슨 곡이냐고 물었더니 영화 <대부>의 주제곡인 'speak softly love'라네요. 영화의 비장함에 비해 이 곡은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는 감미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휴의 첫날 이 곡을 선곡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좀 말랑말랑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짧기는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의 여정은 참 즐거웠습니다. 어떤 장소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혹은 머물렀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통영' 하면 충무김밥이나 오미사 꿀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고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 그곳은 유치환, 백석,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등의 이름과 함께 상기되곤 합니다. 아, 이중섭도 빼놓으면 안되겠네요. 한려수도를 끼고 있는, 구릉이 많고 아담한 이 도시에서 근현대사에 등장한 빼어난 예술가들이 그리도 많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습니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여인을 떠올렸습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백석은 산문 <편지>에서 그 여인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눈에 그려질 듯 생생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친구 신현중의 질투 때문에 어긋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 <바다>에는 어긋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절제된 언어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절절합니다. 시인은 종결어미 '~구려'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그리움을 생생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쇠리쇠리하다'(빛나다)라는 평북 사투리가 왠지 쓸쓸함을 증폭시키는 듯도 합니다. 시인의 시간을 스쳐 지나간 한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사람들에게 보편적 감동을 자아내는 까닭은 모두가 그런 아슴푸레한 기억을 붙들고 살기 때문일 겁니다.


박경리 기념관을 둘러보며 긴 세월 <토지>의 창작에 몰두했던 작가의 뜨거운 혼이 떠올라 숙연해졌습니다. 작가는 자기 문학 세계를 '연민과 생명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했지요. 토지의 종지가 생명 사랑임이 분명하지만, <토지> 이후의 작품은 더욱 작가의 생명 사랑을 두렷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흙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 사랑은 언제나 작은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구현되는 법입니다. 그 작은 것들은 자꾸 멈추어 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요. 멈추어 서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박경리 선생은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밀도 짙은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 허덕이고 못먹는 것에 대한 설명없는 아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아픔에 대한 감성을 잃어버리는 것, 그 아픔에 대해 반응할 줄 모르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타락일 겁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넣어 주실 것이라면서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언합니다.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겔36:26-27a). 노자가 '뻣뻣한 것은 죽음의 무리에 속하고 부드럽고 유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에 속한다'(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도덕경 76장)고 말한 것도 아마 비슷한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저 터널 가까운 곳에 있는 김춘수 유품 전시관을 둘러보며 여러가지 복잡한 감회가 떠올랐습니다. 김종길 교수는 추도사에서 시인을 가리켜 "그만의 시세계를 펼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천생의 시인"이었다고 말했더군요. 동양의 옛 사람들은 위대한 시인을 가리켜 '적선謫仙' 곧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라고 했다지요? 그가 그런 이름에 값하는 존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우리 시사에서도 매우 귀중한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5공화국 시절에 국회의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시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관에 갈 때마다 내가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그 작가의 필체입니다. 언젠가 장충동에 있는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여러 문인들의 필체를 보면서 그 단정하고 유려한 필체에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초등학교 아이의 글씨같은 필체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그게 이광수의 글씨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일순간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김춘수 선생의 글씨는 참 정겨웠습니다. 고담枯淡한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전시되어 있던 '메아리'라는 글의 초고를 보며 빙긋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글씨도 글씨려니와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 "릴케의 비가悲歌를 10번까지 읽는 동안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더라는 일본의 어느 유명한 시인이 쓴 글을 읽고 나도 릴케의 비가를 10번까지 조심조심 읽었지만 어렵기만 하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일본말로 읽었는지 독일말로 읽었는지 그 시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주소를 몰라 물어보지 못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웃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50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 시인은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성복 시인은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를 문학의 세 축으로 말하더군요(이성복, <극지의 시>, 문학과지성사, 2015년 9월 9일, p.89). '장난기'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성복은 장난기가 없으면 예술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네요. 심각하기만 하고 재미도 장난기도 없는 제 글이 문제임을 새삼 자각했습니다.


통영에 머물다가 머리도 식힐 겸 거제에도 잠시 다녀왔습니다. 거제수용소 터를 지나며 너스들과 함께 거즈를 접고 있었던 시인 김수영의 초췌한 모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많이 읽었다지요? 사방이 가로막힌 세계에서 그는 초월의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일까요? 비가 내리는 수용소 터는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감정의 습속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희한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나치의 수용소를 방문할 때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습니다. 다카우,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잔학성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는데, 내리는 비 때문에 오소소 한기를 느끼곤 했습니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바람의 언덕'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뭐 딱히 볼 것은 없었지만 한적한 산책이 주는 위안이 컸습니다. 바람을 거슬러 우산을 펼쳐들고는 텅 빈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한적함이 참 행복했습니다. 그곳을 벗어나 몽돌 해수욕장을 찾은 것은 파도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몽돌이 깔린 해안으로 밀려왔던 파도가 물러나면 자갈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면서 내는 소리가 참 정겨웠습니다. '자글자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매번 다른 소리가 났습니다. 어떤 때는 솔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같았고, 어떤 때는 가마솥에서 밥이 뜸 들 때 나는 소리 같았고,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아궁이에서 볏짚이 타들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삶 또한 그렇겠지요. 파도가 끝도 없이 밀려오고 또 물러나는 리듬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삽니다. 나는 지금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소리는 제 귀에 안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그 소리를 분별하여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소리가 부디 누군가에게 소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덕분에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들었던 앙상블 디토(비올리스트 리커드 용재 오닐이 구성한 악단)의 연주를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 A장조, '송어', D.667은 특히 훌륭했습니다. 연주자들의 소리를 온전히 받아내는 음악당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조화롭던 시간과 화음 속으로 세상의 불협화음이 또 끼어들겠지요. 그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정겨운 곳으로 만드는 이들이 도처에 있으니 말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 가을날, 저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마음 드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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