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평화를 택하는 용기 2015년 10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평화를 택하는 용기


평화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은 유구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의 역사는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번째 사람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 인간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경쟁의식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형제를 적대감을 가지고 바라보게 만들었다.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일쑤 이웃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좌절되곤 한다. 이때 이웃은 제거해야 할 적이 된다.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갈등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이야기는 '함께 존재'(being-with)로서의 인간은 언제든 갈등과 폭력의 상황 속에 빠져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서는 아벨의 피가 땅 속에서 부르짖고 있고,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라멕의 노래는 그러한 인간 존재 속에 깃든 음습한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라멕은 두 아내인 아다와 씰라에게 자기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자기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고 자랑한다. 가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라멕의 노래는 지금도 세상 도처에서 연주되고 있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예방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의지를 누군가에게 강요하거나 관철시키려는 지배의 욕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폭력 사용에 대한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폭력이란 타자에 대한 공격이 과도해서 사람들 사이의 정상적인 만남과 소통을 교란하는 행위이다. 폭력의 가능성이 일단의 사람들에게 집중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린다. 지배와 피지배가 제도화된 것이 국가이다.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폭력의 가능성을 국가에 의탁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폭력을 제도적으로 독점하게 된 국가는 자기 본연의 의무를 잊고 피지배계층을 억압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자기 힘을 과신하는 국가일수록 제국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신분의 파라미드를 구성하는 제국은 생산과 소비를 관리하는 관료들과, 언제든 왕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동원되곤 하는 군사력을 통해 유지된다. 그러나 관료와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제계급은 그런 위계사회를 신의 뜻으로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왕의 곁에 사제계급이나 예언자들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경은 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예언자들을 대개 거짓 예언자들로 제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왕의 뜻을 헤아리는 데 익숙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전까지 애굽 사회의 맨 밑바닥 계층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곤고한 처지를 신의 의지로 이해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지배와 피지배로 갈린 당연의 세계가 불의한 체제라고 선언하셨다. 사람들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동원할 수도 있고 제거할 수도 있는 체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요 도전이다. 출애굽 사건은 그런 피라미드 세계에 대한 부정이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불의한 제국에 대한 신적 폭력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출애굽 공동체가 지향한 것은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난 형제들의 공동체였다.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실험되었던 이소노미아(isonomia) 곧 '무지배'의 세계가 유사한 공동체 말이다. 사사 시대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신 채 저마다 각자에게 품부된 역할을 수행하는 세상의 꿈이 펼쳐진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세상의 꿈은 주변에 있는 왕정국가들로 인해 위기에 처하곤 했다. 다윗 솔로몬 시대를 거치면서 출애굽 공동체의 꿈은 퇴색되기 시작했다.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출애굽 정신을 시금석 삼아 자기 시대를 고발했다.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왕들은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물화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성경에는 거룩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서 만난 적들이나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제거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대 세계의 전쟁은 신들의 싸움이라 일컬을 수 있다. 각각의 신들은 자기들이 관장하는 지역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그 신들의 능력과 관련되었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들은 다른 신들에게 속했던 사람들과 짐승을 다 죽여 없앰으로써 그 땅을 정화하려 했다. 이른바 진멸사상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과 그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던 사무엘의 갈등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안다. 아말렉과의 전투가 끝난 후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과 짐승 가운데 좋은 것들을 진멸하지 않고 여퉈두었다가 사무엘의 책망을 받는다. 사무엘이 했던 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는 구절은 매우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운 말 속에는 피 냄새가 비릿하게 스며 있다. 과연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인가?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 끔찍한 명령이다. 늘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야 했던 이들은 신의 뜻을 빙자하여 공포와 전율을 적들에게 안겨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분이 아니다. 문제는 그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자기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장한 데 있다. 어느 신학자는 이런 형태의 신앙을 가리켜 '부족적 신앙'이라 했다. 부족적 신앙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나님이 늘 자기 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려는 데 있다.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봉헌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는 말이다. 교회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은 가장 부끄러운 역사에 속한다. 신의 뜻을 빙자하여 십자군들은 얼마나 많은 파괴를 자행했던가. 


우리는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실은 이런 호칭을 먼저 들은 사람은 후에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운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이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바야흐로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연 평화는 모든 이들의 평화가 아니었다. 로마 시민들과 그들에게 부역하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평화였다.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수단으로 동원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압도적인 무력을 통해 로마가 제국의 위용을 자랑할 때 변방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소수의 무리들은 로마 황제에게 귀속되던 모든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에 대한 반명제이다. 무력을 통한 지배가 로마의 길이라면, 예수의 길은 섬김과 희생을 통한 공생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죄를 속하기 위해 동물을 바치는 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대제사장이다.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남을 살리는 것이 예수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예수가 제시한 참 평화의 길이다.


역사의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안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안식의 세계는 평화의 세계이기도 하다. 안식이 없는 평화는 없다. 출애굽 공동체에게 야훼 하나님이 굳이 안식일 계명을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쉴 줄 모르는 이들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창조의 주체가 되는 행위를 그치고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머문다는 뜻이다. 그때 이웃은 경쟁이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된다. 아감벤은 우리 시대의 문화가 '호모 사케르', 즉 희생되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깊은 관심과 사랑의 대상임을 상기시키는 일, 폭력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경쟁이나 폭력이 아닌 협력과 사랑을 통한 상생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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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5 10-30 01:10)
안식일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았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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