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2015년 11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꿈을 꾸었다. 다미아노 성인이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해 울고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깜짝 놀라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당신은 천국에 계시잖아요. 그렇죠? 그럼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미아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지. 나는 자네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서 평화롭게 자는 모습을 보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왜 잠만 자는가, 프란체스코! 부끄러운 줄 알게!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당황한 프란체스코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다미아노 성인이 답한다. "손을 뻗치게. 자네의 어깨로 교회를 받쳐서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게!" 주저하는 그에게 성인은 말한다. "자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여.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온 교회가 나의 작은 예배당처럼 퇴락하고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고 있다네.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1>, 열림원, p.76-77 참조)


전해오는 프란체스코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것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도전과 충격이 만만치 않다. 하나님은 권력 다툼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져가고 있던 교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를 부르셨다. 그가 교회에 가져온 선물은 '가난'이었다. 풍요로움이 신자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교회를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그처럼 또렷하게 깨닫고 외친 이가 또 있을까? 프란체스코처럼 가난 자체를 추구할 수는 없다 해도 풍요로움이 주는 안일한 행복은 경계해야 한다. 그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초대는 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예배당 건물은 번듯하게 지어지고 있지만 기둥은 이미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까래는 썩어들기 시작한 형국이 아닌가? 아름답게 돌과 헌물로 치장된 성전을 보고 찬탄하는 이들을 보며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21:6). 어쩌면 이게 지금 우리가 직면해야 할 불편한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예수 정신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비본래적인 열정이 우리를 휘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는 숨기고 회중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메시지만 선포하는 설교자, 공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기 희생의 길을 걷는 대신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려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는 사람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한 삶을 살아내지는 못하는 이들로 인해 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기존 교회에 절망해서 교회를 떠난 신자들의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오늘의 교회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수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자기 부정'이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욕구와의 결별을 요구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면서 십자가의 길은 한사코 외면하는 이들로 인해 교회는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겨울의 초입에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자꾸 떠오른다.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이 고생이구나//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사랑이고/자유인 것을"(<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시인은 늦게나마 '나'에 대한 집착이 모든 '고통'의 뿌리임을 깨달았다. '나'를 내려놓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사랑이 찾아오고, 자유가 유입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우산을 놓고 오듯 놓고 올 수 없는 거라는 데 있다. 그렇기에 '나'를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하다. 평화는 잘 내려놓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자라나는 열매이다. 이것조차 하지 못하면서 '복음'을 말하고 '구원'을 말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나무는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구고 졸가리로만 남아 혹독한 겨울 바람을 견뎌낸다. 잎과 작별하는 나무를 보면 허장성세를 거두지 못하여 남루하기만 한 우리 삶이 자꾸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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