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49-발가벗음, 발가벗기움 2015년 11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발가벗음, 발가벗기움


평안하신지요?

세월이 빠르다는 게 참으로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떠나기 싫은 듯 미적거리던 가을은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겨울 찬 바람이 마치 점령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찾아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래도 성급한 이들은 벌써 연말 분위기를 조성하느라 벽면과 가로수에 빛을 두르느라 분주합니다. 성탄절 장식을 서두르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예배당 한켠에 구유를 마련하는 교회도 늘고 있다지요? 구유를 만드는 전통은 성 프란체스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1223년에 머물고 있던 그레치오 성당에 구유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베들레헴에 갔을 때 주님이 태어나신 마구간 구유를 보고 느꼈던 감동을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의 구유. 하지만 화려하고 큰 예배당에 만들어진 구유는 제게 참 복잡한 감회를 안겨줍니다. 교회는 과연 구유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프란체스코 성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습니다. 그는 중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자 고향인 아씨시로 돌아가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클라라와 자매들의 돌봄을 받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그는 형제들에게 부탁해 그들이 처음 수도회를 시작한 포르티운쿨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옷을 벗겨 맨바닥에 잠시 눕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침내 어스름에 이른 시간 그는 하나님 곁으로 옮겨갔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종달새 무리가 예배당 위를 날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영혼이 하늘로 돌아감을 축하하는 것이었을까요? 형제들은 그의 유언대로 그의 옷을 벗겨 맨바닥에 눕혔습니다. 세상에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는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벌거벗음'은 그의 인생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을 때 그는 아버지 피에트로와 아씨시의 귀도 주교 앞에서 옷을 벗음으로써 세속과 결별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기 전에 또 다시 벌거벗었던 것입니다. 로렌스 커닝햄은 벌거벗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루한 옷가지를 비롯한 모든 것을 내던지고 프란체스코는 그가 설교와 시를 통해 그렇게도 아름답게 찬미했던 어머니 대지의 품에 안겼다. 그의 벌거벗음은 또한 우리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몸짓 언어였다. '재는 재로, 티끌은 티끌로.' 그런 몸짓 뒤에 숨겨진 건 물론 카타리파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물질성을 깎아내리는 이들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흙으로부터 이 물질적인 세계에 태어났으며 창조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세계로부터 밝게 빛난다."(로렌스 커닝햄,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김기석 옮김, 포이에마, 2010년 12월 24일, p.170)


구유로 상징되는 가난과 벌거벗음이야말로 대림절을 지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제가 벌거벗음을 말한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인 것은 잘 압니다만, 자꾸만 그런 사실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가난과 영 결별하고 말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프란체스코처럼 스스로 벌거벗으려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벌거벗겨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이들은 '땅의 사람들'이라 부르지요. 빚에 몰려 종이 된 사람들, 일하고도 품삯조차 제때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벌거벗기운 사람들입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그런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목소리는 경청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 통합과 안전을 깨뜨리는 불온한 이들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힘들다는 외침은 무능하다는 꾸짖음으로 덮어버리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는 탄식은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립니다. 누군가 일어나 공의를 회복하라고 외치면 기득권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조용히 해' 혹은 '가만히 있으라'며 그들의 요구를 무질러버립니다. 서민들의 지갑은 투명한 유리지갑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모든 국민들의 일상은 파놉티콘에 숨어 있는 권력의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은 결국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로 고착되고 맙니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 채 노동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의 해고를 쉽게 하는 내용의 노동법을 제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간제 노동자들의 계약기간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려 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1822)입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조각배 한 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저 멀리로 불타고 있는 성벽이 보입니다. 이미 물에 빠진 이들은 필사적으로 배에 매달리려 합니다. 하지만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그들은 어리석게도 서로를 밀쳐내려 합니다. 배 위에는 세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근육질의 등을 보이며 노를 젓고 있는 사공입니다. 그리고 옷을 걸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흰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옆 사람의 몸에 의지한 채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당황한 모습입니다. 그가 바로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입니다. 그의 곁에는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당혹스러워하는 단테의 왼손을 가만히 감싸고 있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지극히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로마시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여행의 한 장면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통해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던 프랑스 사회가 갈 길을 묻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 광기와 폭력이 사람들의 가녀린 삶을 조각내던 시대에 그는 베르길리우스처럼 역사의 길을 안내할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그림을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 빗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벌거벗기운 자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죄옥에 떨어진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스틱스 강의 검은 물결 속에서도 남을 밀쳐내거나 목을 조르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 난파당하고 벌거벗기운 이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홀로 살겠다고 다른 이들을 배 밖으로 밀쳐낸 사람들 때문에 그리 된 것입니다. 지옥은 나의 행복을 위해 '너'를 배제하려는 마음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베르길리우스 같은 길 안내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도자연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더 큰 권력 앞에 납작 엎드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비애를 느낍니다. 인간적인 교양이나 양심은 발동되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비루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어 삶이 남루해집니다. 가끔 제게 와서 자기 신념에 위배되는 일을 요구받을 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거절하자니 쫓겨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고, 따르자니 양심이 괴로운 것이지요. 그런 상황으로 사람을 내모는 현실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저는 간명하게 대답하곤 합니다. 자기 삶의 원칙을 위반하면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열망이 크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끝내 자기에게 어두운 그늘로 작용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소신껏 일하다가 쫓겨날 때가 되면 쫓겨나라고 말입니다. 남 이야기여서 쉽게 말한다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에게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예수에게 쫓겨났지만 그는 지금도 건재합니다.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려는 욕망, 남보다 큰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지 못해 우리는 사탄의 종이 됩니다. 자꾸 비우고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은 벌거벗기운 자들입니다. 그 사실을 자기만 모릅니다. 에스겔은 우상 앞에 절을 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면, 그들이 네 누각을 헐고, 네 높은 단을 무너뜨릴 것이며, 네 옷을 벗겨 버리고, 네 모든 장식품을 빼앗은 다음에, 너를 벌거벗겨 알몸으로 버려 둘 것이다."(겔16:39)

 

벌거벗기운다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달콤한 정부(貞婦)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의 운명이 그러합니다. 과도한 욕망의 길 끝에는 수치가 있습니다. 제 눈에는 이게 너무나 확연하게 보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스스로 발가벗었고 주님은 그에게 흰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위해 공의를 훼손하고 누군가에게 지옥을 안겨주는 이들은 벌거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깥 바람이 차가워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계절입니다. 반코트를 갖춰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나서는데 알몸으로 오고 계시는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옷이 되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모처럼의 편지를 너무 무겁게 썼습니다. 늘 동행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청안청락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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