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예레미야 산책1 2016년 0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말씀이 임하다

본문: 렘1:1-10


예레미야의 활동 연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일까, 슬픈 일일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말씀이 압도적으로 한 존재를 사로잡으면 그는 좋든 싫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예언자들은 대개 역사의 비상 국면에 소명을 받곤 한다. 그들의 말은 그렇기에 단호하고 절박하다. 솔개가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하강하는 것처럼 그들의 말은 그렇게 사람들의 양심을 급습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기가 없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는 그걸 알면서도 그 운명을 회피할 수 없다. 


예레미야서는 이런 말로 시작된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의 땅 가운데서 레위인들에게 제공된 성읍이었다(대상6:60). 왕위 계승 다툼의 와중에 아도니야의 편에 가담했다가 솔로몬에게 쫓겨난 제사장 아비아달도 아나돗 출신이었다. 성경은 아비아달이 실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엘리 제사장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왕상2:27). 지방 성소인 실로의 전통과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한직으로 밀려난 이후 아나돗 제사장들은 늘 변방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아나돗 출신이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고"(2). 요시야 13년은 주전 626년에 해당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부흥과 개혁의 기대감을 높였던 요시야 왕 때 부름받은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시대를 거쳐 시드기야 십일년 말까지 말씀의 담지자로 살았다(실제로 그의 예언활동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까지도 이어진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산 세월이 대략 40년이 넘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구명도생해야 했던 역사의 격동기였다. 정신적 혼돈이 극심했고, 두려움과 불신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실로 고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명 이야기

4-10절까지는 소명 이야기이다. 여호와는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알았고, 성별했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을 근거로 예정론을 들먹일 이유는 없다. 이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인가? 택함은 그의 인간적 자질을 시험해 보신 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 이 구절은 제한이 시간의 지평 저 너머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를 가리키고 있지만, 동시에 예레미야가 어쩔 수 없이 수납해야만 할 그의 운명의 서곡이라 할 수 있겠다.


예레미야는 즉시 자기 속에 일고 있는 당혹감을 표현한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한마디로 말해 사람 잘못보셨다는 것이다.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도 근기도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겸양을 떨기 위해 짐짓 하는 말이 아니다. 부름은 언제나 실존적인 위험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어렵게 유지해오던 삶의 질서를 산산조각내는 폭풍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단호하고도 확고한 부름이다. 소명은 인간적인 능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필요한 자질은 있다. 그것을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그는 가야 한다. 전하라 하신 말씀을 전해야 한다. 부름을 한사코 거부하려는 마음의 뿌리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 아시기에 말씀하신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8). '그들'은 물론 말씀의 청취자들이다. 일반 백성들도 그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로 향하는 것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 소명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며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이 장면은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4:10)라며 소명을 철회해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치겠다(출4:15)고 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셨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신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소명은 매우 무겁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셨으니라 하시니라"(10). 옛 세계의 심판과 관련된 단어가 네 개이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관련된 단어가 둘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무너뜨리려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환상

본문 / 렘1:11-19


살구나무 가지, 끓는 가마솥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는 자'이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 혹은 '로에'는 '선견자'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그들은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꿰뚫어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아니 차라리 보려 하지 않는 질서를 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스럽다. 11절부터 나오는 두 가지 환상 이야기는 예레미야의 소명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한다. 하나님의 질문과 예레미야의 대답, 그리고 그 환상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물으신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가 보인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잘 보았다고 그를 칭찬하시며 그 환상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앞뒤 문장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짤막한 대화 속에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히브리어의 말놀이가 숨겨져 있다. '살구나무'를 뜻하는 단어는 '샤케드'이다. '지키다'라는 뜻의 단어는 '쇼케드'이다. 그러니까 살구나무의 환상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키겠다는 약속의 가시태인 셈이다. 살구나무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택하셨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등장한 바 있다(민17:8). 따라서 살구나무 가지 환상은 1장 5절에 나오는 '성별하였다'는 선언과 8절에 나오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자 예레미야는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13) 하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 환상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질 것 재앙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신다. 북쪽(차폰)은 특정한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마치 오른쪽이 하나님의 도움이 오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북쪽은 늘 강력하고도 악마적인 힘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북쪽의 위협은 신화적이지만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발흥했던 제국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실체였다.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제국들이 그러하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라

예레미야가 본 끓는 가마의 환상은 북방에서 시작된 위협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녀린 생존을 압도적으로 유린하리라는 사실의 예고였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는 이들은 아마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명을 받았던 요시야 시대에는 북쪽의 위협이 그렇게 실체적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5). 하나님은 미구에 닥쳐올 일들을 분명하게 예고하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북방의 위협이 하나님의 질서와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 부를 것인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끓는 가마솥을 아래를 향해 기울어지게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16).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나'와 '다른 신'이 대비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까지 찾아와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이끄시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다른 신'은 위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제들에 의해 동원되곤 하는 신들이다. 그 신들은 왕과 힘있는 이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실제로 그들은 '없는 존재', '공허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상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그 우상들을 섬겼다. 하나님은 그런 죄를 엄중하게 심판하신다. 심판을 뜻하는 단어 '미슈파트'는 재판관이 법에 따라 내린 판결이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심판의 선고를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17). 예언자는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움 없이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18). 확고하고도 강력한 약속이다. '너는 ~ 말하라'는 명령어와 '내가 오늘 너를 ~이 되게 하였다'는 서술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단단한 성채를 이루고 있다. 여호와는 예레미야가 겪게 될 위기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그를 치려는 이들이 많겠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재차 약속하신다.





















두 가지 악

본문 / 렘2:1-19


퇴색된 구원의 기억

예레미야의 예언은 옛 일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머물던 시기에 그 백성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성실했다. 아무 것도 바라볼 것 없는 허허로운 광야, 전갈과 독사가 우글거리고 뜨거운 햇볕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위협하던 그곳에서 탈출 공동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절감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단순하게 믿었고 하나님의 은총은 어김없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 하나님은 그 때를 이스라엘의 청년 시기 혹은 신혼 때라 일컬으신다. 비록 삶의 자리는 척박했으나 감사와 감격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라고 말씀하신다. 억압의 땅을 벗어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 돌입했던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빚으신 작품이었다. 


그러나 시절이 달라졌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지 않아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고,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지 않아도 목마름을 해결할 다른 길이 열렸다. 어느 신학자는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하나님까지도 바꾼다 했다. 그른 것 없는 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또한 달라졌다. 청년 때의 용기나 신혼의 달콤함은 사라지고 권태만 남았다.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5). 망각이야말로 죄가 유입되는 통로이다. 아름다운 기억이든 고통스런 기억이든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이 조건이 달라지자 더 이상 자기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고, 또 그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게 하셨던 하나님은 잊혀졌다. 시내산 아래에서 하나님과 감격으로 맺었던 언약을 그들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비전은 스러졌고, 그들은 자기 좋을대로 행하는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으신다. "너희가 이리로 들아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7b).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도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찾지 않고, 율법을 다루는 자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관리들은 반역을 획책하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한다. 기가 막힌 전락 아닌가.


백성과 싸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 패역한 백성과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9). 새번역은 이 대목을 "내가 너희를 다시 법대로 치리하겠다"고 번역하고 있다. 자기들을 구원하고 인도하신 분을 배신하는 일은 깃딤 섬(키프로스 섬)에서도 게달에서도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비록 참 신은 아니라 해도, 한번 믿었던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이 어디 있느냐고 여호와는 백성들을 책망하신다. 이스라엘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다'. '무익한 것'은 우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굳게 믿었던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시인 최승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꿰뚫어보면서 "화장한 문둥이 얼굴을 들고/미소짓는 자본주의의 밤"(<赤身>)을 섬뜩하게 드러냈다. 그는 또 물질주의의 우상 앞에 절하는 세상의 모습을 "풀벌레 한마리 울지 않는 여기는, 타일에도 꽃이 피고, 눈에도 헛꽃이 피어나는, 헛꽃만다라의 서울."(<남자용 변기를 닦는 여자>)이라 노래했다. 어쩌면 육체를 가진 사람은 헛꽃만다라에 사로잡히곤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죄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생수는 살아있는 물이다. 물은 언제나 생명과 관련된다. 창세기는 에덴 동산에서 발원한 물이 사방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창2:10). 에스겔은 성전 아래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나는 기적을 비전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의 근원을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다. 그 결과 그들에게 닥쳐온 것은 삶의 가뭄이었다. 적들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르고, 땅은 백성들의 죄 때문에 황폐하게 변했다. 그 모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초한 일이다. 그들은 시홀의 물(나일 강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갔고, 유브라데스의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달려갔다. 마치 그들이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9). 악은 늘 부메랑이 되어 저지른 자에게 돌아온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섭리 방식이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악의 뿌리는 명확하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온다. 베드로도 닭의 울음 소리가 난 후에야 자기가 한 일을 자각했다.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본문 / 렘2:20-37


네 길을 보라

역사는 예속에서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다. 삶을 억압하는 일체의 권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이 자유인의 긍지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 앞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앞에는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계선이 필요하다. 시내산 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언약의 파트너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가르치셨다. 그것은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명을 일쑤 어기곤했다. 마치 그것이 자기들을 구속하는 차꼬라도 되는 것처럼.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20). "나는 순종하지 하니하리라". 이 말은 설혹 발설된 말은 아니라 해도 의지의 지향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언자는 '멍에'와 '결박'을 끊어주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사람들을 구속하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통탄한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이 찾아간 것은 우상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판 웅덩이, 물을 가두지 못하는 웅덩이였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을 따라가는 것을 예언자는 '행음'이라 일컫는다. 신실한 사랑의 맹세는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그들의 죄는 잿물로도 많은 비누로도 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23a) 한다. 어쩌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바알 신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스스로 깨끗하다고, 바알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외적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발설된 말이나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을 보신다. 세상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23a)이라 말씀하신다.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이란 물론 우상을 찾아가는 길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런 골짜기는 실은 우리 마음 속에 있지 않은가. 그 마음을 잘 살펴보면 자기가 누구를 섬겼는지 드러나겠지만 죄에 빠진 이들은 이미 성찰의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삶을 그려 보이신다. 그들의 삶은 발이 빠른 암낙타가 어지럽게 달려가는 것 같고, 들암나귀들이 성욕이 일어 헐떡거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이들의 제어하기 어려운 맹목적 열정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예비된 수치

이제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이 예고된다. "이스라엘 집 곧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붙들린 도둑이 수치를 당하듯 수치를 당할 것이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소위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한 나라의 죄는 지도자들의 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백성들이 무죄하다는 말은 아니다. 백성들 역시 욕망의 벌판을 질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도자들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신다.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그들이 더 앞장서서 그릇된 길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고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27a) 하면서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마주봄이 관계의 시작이라면 등 돌림은 관계의 파탄을 상징한다. 사랑은 마주보게 하고, 죄는 등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환난의 때가 오면 돌과 나무의 무능이 드러난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성읍의 수만큼 우상들이 많아도 터진 웅덩이일 뿐이다.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28a) 통렬하지 않은가.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하여 신들을 만들며 산다. 흔들림 속에 있는 인생의 안전 장치라 생각되는 돈과 지위와 연줄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동안 하나님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반역 때문에 마음 아프시다. "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29a). 그들은 매를 맞고도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들인 선지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31). 백성들이 척박한 광야와 절망의 어두운 땅을 통과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오히려 광야와 캄캄한 땅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제는 망각이다. 초심을 잃은 것이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서 그들은 광야 시절을 잊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사랑을 얻으려고 자기를 몸을 치장하는 여인과 같이 되었다. 새번역은 33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너는 연애할 남자를 호리는 데 능숙하다. 경험 많은 창녀도 너에게 와서 한 수 더 배운다." 


타락한 이들이 득세하는 세상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가혹한 곳이다. 하나님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옷단에 묻은 가난한 이들의 피를 보신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지도자들은 '나는 무죄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땅에서 부르짖는 아벨의 피의 소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회에 예비된 것은 수치이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본문 / 렘3:1-25


타락한 이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뻔뻔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은 음행하는 사람과 같다. 땅조차 그들의 음란과 악행으로 인해 더럽혀졌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3).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그들은 위기의 상황이 닥쳐올 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청년 시절의 보호자'라고 부르며 도움을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여움을 끝까지 품지 않으시리라는 그릇된 확신으로 인해 그들은 욕망이 잡아 이끄는 길로 주저없이 나아가곤 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을 방종한 삶으로 이끄는 아이러니. 선을 악으로 갚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불신의 공간으로 바뀌지 않던가. 


요시야 왕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모두가 유다의 부흥을 꿈꾸던 그 때, 예언자는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직감한다. 유다는 이스라엘이 겪은 참상을 보았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죄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상 앞에 절 하고 외세에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하려 했다. 하나님은 배역한 이스라엘에게 이혼장을 주어 내쫓았다. 유다는 그것을 똑똑히 지켜보았으면서도 '언니'인 이스라엘이 했던 일을 반복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무색한 상황이다. 그들은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함으로 땅을 더럽혔다. '돌아오라'는 부름은 경청되지 않았다. 어려움이 닥칠 때면 잠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척 했을 뿐 진정으로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깨달음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하나님은 차라리 이미 망해 버린 이스라엘에게서 희망을 본다. 그래서 예언자에게 선포하라 이르신다.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12). '배역'이라는 단어는 '돌아오다'(슈브)라는 단어의 반명제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 이르신다. 돌아옴의 조건은 단 한 가지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아온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남편'(14)이라 말씀하신다. 남편이라 번역된 단어 '바알'은 '임자' 혹은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중의적인 뜻이 담겨 있다. 바알을 숭상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따라갔던 이방신 '바알'이 아니라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했던 여호와가 바로 참된 '임자'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이지만 여호와는 흩어진 그들을 각 성읍에서 하나 둘씩 시온으로 불러 모으고, 당신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줄 것이라 예고하신다(14-15). 그 목자들의 통치 원리는 '지식'과 '명철'이다. 그 목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번성하게 되면 더 이상 언약궤를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언약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이어주는 가시적 증거물이었다. 회복된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런 매개물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그만큼 친밀해질 것이라는 예고이다.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주의 보좌가 놓인 세상의 중심이 되고 뭇 민족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고, 죄에서 벗어난 새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18). 분단이 극복된 아름다운 세상의 꿈이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 


하나님을 등진 삶

19절부터는 맥락과 어조가 달라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녀로 삼고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어서 뭇 나라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민족으로 만들어주면 그들이 "나의 아버지" 하며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 설렘은 오쟁이진 남편의 쓰라림으로 변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편을 속이고 떠나간 아내처럼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속이다'는 불성실함으로 상대방의 기대를 저버림을 의미한다. 예언자는 문득 한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21). 하나님을 등진 삶의 결과는 애곡이다. 이 애곡을 들으시며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신다. 


22절은 하나님의 초대와 백성들의 응답을 함축적으로 요약한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22a) 하나님은 어긋난 길로 나간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 이르신다. 돌아올 때 비로소 그들의 배역함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옴'은 강제할 수 없다. 부름받은 이들의 의지적 응답이 필요하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22b). 마침내 그 백성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돌아온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지난 날의 과오를 자복한다. '작은 산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 즉 우상을 숭배하던 일이 헛된 일이었음을. 23절에 나오는 '참으로'라는 부사는 깨달음의 적실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23b) 돌아온 백성들은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죄를 인정한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이다. 때늦은 자각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버렸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각은 소중하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지 않던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본문 / 렘4:1-31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부름이 참으로 절박하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1a). 예기치 않은 고통은 때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노역이 아까워 내처 그 길로 가면 더 깊은 심연에 빠져들 뿐이다. 여호와는 '내게로 돌아오라' 이르신다. 돌아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가증한 것'은 우상이다. 우상이 준다고 믿었던 안락함과 풍요에 대한 환상을 떨쳐버리고 주님이 부르신 길 위에 확고히 서는 것이 삶의 길이다. 그런 이들의 삶은 '진실(에메트)과 정의(미쉬팟)와 공의(츠다카)'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세계 만민이 주님을 찬양할 것이고 주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돌이킴은 삶을 통해 확증된다. 가시덤불에 씨를 뿌려봐야 소용이 없다. 묵은 땅을 먼저 갈아엎어야 한다(3).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해야 한다(4).


나팔소리가 들려올 때

그렇지 않을 때 비극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하나님의 분노가 불처럼 일어나 모든 것을 사르게 될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임박한 위기를 예고하고 그들을 견고한 성읍으로 이끌어야 한다.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6a). 단문으로 숨가쁘게 이어지는 이 구절은 사세의 급박함을 드러낸다. 북방에서부터 재난과 큰 멸망이 몰려온다. 나라들을 망하게 하는 북방의 사자가 풀려났다. 1장에 나오는 환상 이야기처럼 끓는 가마솥이 남으로 기울어졌다.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바람이 광야로부터 불어온다.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주민들은 사라질 때 비로소 왕과 지도자와 제사장들은 크게 당황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 깨닫는다. 사람들은 그 북방에서 몰아치는 사자의 기세에 놀라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13b) 하고 외칠 것이다. 예레미야는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적군을 묘사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14). 희망은 마음의 악을 씻는 데 있다. 이런 큰 재앙은 그들이 지금껏 택해온 삶의 방식이 불러온 것이다.


미구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면서 예레미야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19). 이것은 그저 '마음이 아프다' 정도가 아니다. 새번역은 이것을 생생하게 번역하고 있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 소리가 들려 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온다." 아무도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을 때 홀로 보고 듣는 자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절절하다. 예언자는 그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안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한 백성으로 인해 예언자의 가슴이 무너진다.


혼돈으로 변한 세상

23절부터 26절에 이르는 짧은 단락에서 우리는 형태를 조금 달리하면서 반복되는 구절과 만난다. '보라 내가 ~을 본즉', '내가 본즉'이 그것이다. 예언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땅의 혼돈과 공허, 빛 없는 하늘, 진동하는 산들, 사람이 없는 땅, 새들조차 날지 않는 하늘 그리고 황무지로 변한 땅과 무너진 성읍이다. 묵시록적 풍경이다. 하지만 이 단락을 뒤집힌 창조 이야기로 보아야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 '깊음'으로 상징되는 상황으로부터 빛과 질서를 이끌어내셨다. 그런데 사람은 빛과 질서의 세계를 혼돈과 공허로 되돌려놓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샀기 때문이다. 희망은 없는가? 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기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27).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원뜻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은 열어두신다는 것이다. 땅이 슬퍼하고 하늘이 어두워질 때, 적들의 침략으로 사람들이 수풀 속에 숨고 바위에 기어오를 때가 온다.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30a). 통렬한 질문이다. 이제는 돌이켜 여호와께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30).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니 참담할 뿐이다. 여기서 '연인'은 유다를 노리는 강대국들을 의미한다. 유다는 그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돌아오려거든 내게 돌아오라'(1)는 초대는 경청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예언자는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첫 아이를 낳는 여인의 신음하는 소리, 시온의 딸이 몸부림치는 소리이다. 희망이 끊어진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절규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념(파토스)에 사로잡힌 자인 동시에 그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 몸에 짊어지는 자이다. 예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기에 십자가의 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정의를 구한다면

본문 / 렘5:1-31


멸망이 예고되다

여호와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며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1) 그 성읍을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속뜻은 올바름을 추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의인 열 명이 없어 무너졌던 소돔과 고모라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정말 그럴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구절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느끼는 절망의 깊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이는 물론 있다. 하지만 그의 맹세는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매를 맞고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얼굴은 바위 같이 굳을 뿐 돌이킬 줄은 모른다(3). 그들이 본디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이어서일까? 그래서 예언자는 여호와의 길을 안다 자부하는 지도자들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5b). '안다' 하는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노골적으로 거역한다. 그들은 입술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삶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기껏 먹여놓았더니 육욕에 사로잡혔고, 창녀에게로 달려가 음행을 저질렀다. 이 참담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9).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10). '너희'는 심판의 도구로 부름을 받은 외국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군대에게 패역한 이들의 성읍을 무너뜨리되 완전히 훼파하지는 말라 명하신다. 압도적인 기세로 하나님의 백성을 몰아칠 적들도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다. "가지만 꺾어 버리라"는 구절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빗대 말하곤 했던 옛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꺾인 가지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벗어난 이들이다. 하지만 잘려지는 것은 가지일 뿐 둥치는 여전히 남겨진다. 백성들이 겪게 될 시련은 그들이 자초한 것이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고, 재앙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헛된 바람에 기대 살았다. 거짓 예언자들 때문이다. 평안이 없을 때에도 '평안'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고 제 밥벌이를 하던 이들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예언을 준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백성들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먼 곳에서 한 민족을 데려다가 그 백성을 치게 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은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고 언어가 다른 민족이다. 그들은 다 용사이고, 그들의 화살통은 열린 무덤과 같다. 그들은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가지는 꺾되 둥치는 남겨두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완전히 전멸시키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신다(18). 시련과 고통은 피할 수 없다. 다만 그 시간을 연단과 정화의 시간으로 삼을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삶의 경계를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향해 말씀을 전하라 이르신다.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섭리하신다는 엄정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바다는 모래를 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여 두신 경계를 넘지 않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은 일쑤 그 경계선을 넘곤 한다. 그들 내면 깊은 곳에 배반하고 반역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첫 사람들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뱀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 이래 인간은 죄의 유혹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죄에로의 경향성을 끊어버릴 힘이 인간에게는 없다. 죄에 이끌리는 이들은 늘 결핍 속에서 살아간다. 영혼의 헛헛함을 채울 길 없어 '존재'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은혜를 은혜로 분별할 줄 모르는 청맹과니들이다. 지금 여기서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을 선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누릴 줄도 모른다(25).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26-27a). 기막힌 전락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덫을 놓는 사람으로 변하다니.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금수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탐욕 때문이다.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28). 부유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양심은 작동하지 않는다. 타자들의 곤경을 연민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동안 그들은 낙을 누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 말이다.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29).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일을 즐긴다. 백성들은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분별할 능력이 없다. 몰락은 이미 정해졌다.



















반역하는 백성들

본문 / 렘6:1-30


추수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재앙의 시간이 다가온다. 1절은 세 가지 명령어로 이루어져 있다. '피난하라', '나팔을 불라', '깃발을 들라'. 명령은 베냐민 지파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인접하여 살던 이들이다. 북방에서 큰 파멸이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이제는 떠날 때라는 것이다. 3절에 나오는 양 떼를 몰고 오는 목자들은 군대를 이끌고 오는 이방 왕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시온을 치는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침공을 막아주셔야 할 만군의 여호와께서 오히려 마치 사령관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을 진두지휘 하신다. 나무를 잘라내 시야를 확보하고, 흙 언덕을 쌓아 올려 공격하기 좋은 지점을 확보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이 어찌 이리도 매정하실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다. 언약의 파트너인 백성들에게 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은 경청되지 않았다. '폭력과 탈취'가 일상이고 '질병과 살상'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러니 그 성은 무너져야만 한다. 그게 하나님의 정의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이다. 어려움을 겪고도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땅이 황폐해져서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침략자들은 마치 포도를 거두는 일꾼들이 그러하듯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샅샅이 찾아내 데려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예레미야에게 떨어진다.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9b). 시간이 촉박하니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속히 구해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 속에 깃든 절망감을 토로한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10-11a).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른다. 여호와는 그 분노를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 남편과 아내, 나이 든 이들에게 부으라 하신다. 그러면 그들의 집은 물론 밭과 아내조차 다른 이들의 소유로 넘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하나님은 왜 이리도 화가 나셨나? 모든 사람들이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들을 마땅히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이웃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심의 특징은 자기 중심성이다. 과도한 욕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죄를 폭로하고 경계해야 하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 그들은 백성들이 처한 곤고한 처지를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러기에 평강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고 말한다. 백성들의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가 얼마나 위험한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무지와 영적 빈곤을 알지 못하기에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책임을 특권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주어질 운명은 '엎드러짐' 혹은 '거꾸러짐'이다(15). 


이제 잠시 멈추어 서라

그런 참담한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영영 없는 것일까? 하나님은 가능성의 문을 아주 닫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16a)고 이르셨다. 앞만 보고 달리는 숨가쁜 질주를 멈추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딘지 가늠해본 후 나아가라는 것이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법이다. 일단 멈춰야 호흡이 가지런해진다.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삶의 병통이다. 멈추라는 명을 받고도 어리석은 백성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리켜 보이는 생명의 길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했지만 백성들은 파수꾼들의 경고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의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은 신실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 제사를 바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외적 헌신에 현혹되지 않으신다.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20). 신실한 삶이 배제된 종교적 행위는 그저 몸짓일 뿐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 앞에 장애물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다시 한번 북방에서 오는 한 민족,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난 큰 나라의 침공을 예고하신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들, 활과 창으로 무장한 그들이 시온을 치기 위해 일어섰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다 맥이 풀렸고 해산을 앞둔 여인처럼 불안에 사로잡혔다. 피신할 곳도 없다. 들녘도 거리도 안전하지 않다.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하나님은 일찍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그 백성의 삶을 살피게 하셨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그들의 존재를 요약하는 말은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반역한 자',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 놋과 철', '사악한 자'. 맹렬한 풀무불이 타오르면 불순물들이 걸러질 법도 하건만 백성들의 죄악은 도무지 제거되지 않았다. 삶으로부터 죄가 분리되지 않으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고 사람들은 그들을 일러 '내버린 은'이라 할 것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는 26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사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성전 설교

본문 / 렘7:1-34


성전의 우상화를 경계하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는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간추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저런 곤경에 처할 때마다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달라는 내용이다. 이후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의 중심인 마음의 본향이되었다.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는 철회되지 않는다는 믿음처럼 든든한 게 또 있을까? 


어느 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라 이르신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3). 평범한 권고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 아니, 그것이 여호와의 성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말이 '거짓말'이라니! 이런 판단의 근거는 다음 대목과 관련된다. 성전이 성전되는 것은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이들의 삶에 달려있다. 그들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이웃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비로소 그곳은 성전(5-7)이라 할 수 있다. 성전은 특정한 공간 혹은 건물이 아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세워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전이 있는 한 안전하다고 믿는 이들의 의식에 예레미야는 철퇴를 가한다.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일만 하면서도 성전에 들어가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10)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이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보며 실로 성소의 운명을 돌아보라 말씀하신다. 실로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제사장들과 그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주전 11세기 경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엘리 제사장의 먼 후손으로 소개되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실로 성소는 부끄러운 기억의 장소였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은 지금 매우 위험한 지경으로 내달리고 있다. 실로가 무너진 것처럼 성전도 무너질 수 있고, 에브라임 자손들이 내쫓긴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내쫓길 수 있다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깊고도 깊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이르신다. 설사 기도를 한다 해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16).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라 하신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18). '하늘의 여왕'은 고대 근동 지방의 다양한 종족들이 숭배하던 여신들 곧 바벨론의 '이쉬타르' 혹은 셈족의 '아스다롯'이나 '아세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여신들이 풍요와 생산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온 가족이 대동단결하여 '하늘의 여왕'의 모습을 담은 빵을 만드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또한 다른 신들에게 전제(다른 제물에 곁들여 부어 바치는 제물)를 바쳤다. 진노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20). '진노'와 '분노'라는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나란히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부으리니'라는 단어는 앞에서 등장한 '전제를 부음으로'라는 구절과 어울려 아이러니를 빚어내고 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헌신 없이는 곤경에 빠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에게 번제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 뿐이었다. 진정한 '들음'은 청각기관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오직 '들음'을 통해 지속된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완악한 마음에 사로잡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선지자들의 말도 들은 체 만 체 하고 말았다. '들음'은 변화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행위이다. 신앙이란 순간순간 우리 삶에 육박해오시며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의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28). 참으로 두려운 선고이다. 


타락한 백성들은 심지어 성전에 더러운 우상을 세우기도 했고(요시야의 할어버지인 므낫세는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 참고. 왕하21:7), 힌놈의 골짜기(예루살렘 남서쪽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를 불에 사르기도 했다. 잔인하고 맹목적인 이교의 풍습이 자행되면서 약속의 땅은 살육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가인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듯이 억울하게 죽임 당한 이들이 피가 또 다른 피를 부른다. 폭력으로 인해 황폐해진 땅, 그곳에서는 일상성이 파괴되고 죽음의 기운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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