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3 2016년 04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3)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너무 분주하게 지내느라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분의 솜씨를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요? 묻고 보니 질문이 너무 각박합니다. 가끔 계절 이야기를 하면 '참 한가로운 사람이구나' 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각박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곤고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눈빛을 보내는 이들에게 아주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곤고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까닭은 처리해야 할 일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더러 해찰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눈을 팔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현실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눈을 파는 순간 우리를 붙들고 있었던 삶의 문제라는 게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일전에 저를 찾아온 젊은 신학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중에 들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한 분은 여러 해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선교회와 수도원을 순례하고 돌아왔더군요. 젊은 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의문을 풀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7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세계 각지를 떠돌았으니 그 길 위에서 겪은 일이 예사롭지는 않을 겁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보람 있는 일도 많았겠지요. 무엇보다도 그 길 위에서 만났던 이들의 흔적이 그의 영혼 속에 어떠한 형태로든 남았을 겁니다. 그 홀가분한 유목적 떠돎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 긴 여정을 마친 후 그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경험한 바를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그가 익혀야 했던 언어는 그의 삶의 경험을 가지런하게 설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얽어매는 사슬이 되곤 했습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신학이 사람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기는커녕 익숙한 세계에 붙들어매두려는 질곡으로 인식된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신학일까요? 아니면 그 세계에 순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일까요? 


젊은 신학도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몇 권의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이 정도는 읽었겠지 하면서 물어보면 책은 물론이고 저자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지도 교수님께서 자기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면서 변명삼아 말씀하시더군요. 학생들이 그렇게 다양한 독서를 하지 못하는 까닭은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가 나무 과중하고,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서 너무 분주해서 그렇다구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세대가 책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진 것 아닌가요? 책을 읽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분초 단위로 분절된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이들이 이드거니 앉아 책을 읽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새로운 정보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입니다. 습관처럼 새로운 소식을 클릭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정보는 우리의 지식으로 온축되지 못하고 시간의 강물 속에서 거품처럼 스러질 뿐입니다. 시간에 쫓겨 사는 이들은 자기 현실에 대해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일상의 일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숨가쁘게 페달을 밟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일견 흥미진진한 것처럼 보이는데, 조금 지나 생각해보면 권태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짜릿한 것을 찾아 나섭니다. 자극에 자극을 더해가는 동안 우리 마음은 전각류를 닮아갑니다.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떠오릅니다. 어린 왕자가 찾아갔던 별 가운데 술주정뱅이의 별이 있지요. 어린 왕자는 그가 딱해보여 왜 자꾸 술을 마시냐고 묻습니다. 그는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합니다. 뭐가 부끄럽냐고 묻자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합니다. 악순환입니다. 그 고리를 끊어낼 용기를 내지 못해 인생이 남루해집니다.


며칠 전 청년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분쟁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분쟁 지역에 머무는 동안 그는 황폐해진 청년, 청소년, 어린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예술적 재능을 잘 활용했습니다. 이땅에 머무는 동안에도 안일한 평안을 구하지 않고 의미있는 삶을 모색하던 이였기에 그의 그러한 헌신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그래도 그는 그것을 어려움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순박하고 때로는 변덕스러운 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힘겹기는 했지만 무의미한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에게 그런 신산스런 삶을 선택하는데 기독교 신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냐고 물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음에도 없이 한 대답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자기를 그런 자리로 인도했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자기 활동에 장애가 될 때가 많더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더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은 그가 일하는 데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거치장스러운 외투였습니다. 그런데도 왜 기독교 신앙을 떠나지 않으냐고 묻자 그건 마치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여전히 유목적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이 정해놓은 표준화된 삶의 길에서 일찌감치 벗어났기에, 그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그를 루저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어 루저가 된 이들의 가슴에는 회한이 남기만 자발적으로 루저의 길로 접어든 이들의 가슴에는 자유가 깃들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그런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경쟁과 욕망으로 빚어진 철옹성 같은 자본의 벽에 그는 작은 틈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현하는 이들이야말로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게 붙여졌던 별명에 합당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 


내가 참 좋아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는 매사에 진지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배우려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턱 없는 진지함으로 다른 이들을 질식시키는 사람은 아닙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는 진실에 복무하려는 용사임이 분명합니다. 규모가 제법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데, 그는 요즘 그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 큰 교회로 옮겨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에 대해 회의를 품게 할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목사로서의 자기 삶이 진실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과 삶이 틈없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자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만류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울면서라도 감당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는 어느 날 심각한 회의에 빠졌습니다. 자기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회중들 앞에서 선포한다는 것이 위선적인 일처럼 생각되어 그는 번민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벗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때 그 벗은 웨슬리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믿음이 없거든 믿음을 얻기 위하여 설교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이 얻어지거든 그 믿음으로 설교하십시오." 가끔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거친 길 위에서 뭔가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지향이 분명하다면 낙심할 것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몸으로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은 그의 삶의 실험을 만류할 자격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그가 걸어갈 그 길을 나는 설렘으로 지켜보려 합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적당히 속됩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속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우리는 욕망 주위를 맴돌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또 거룩함에 대한 이끌림도 있습니다. 욕망도 거룩한 삶의 욕구도 우리 삶을 잡아당깁니다. 어느 쪽에 끌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질 겁니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작품 가운데 <내가 버린 여자>가 있습니다. 제목이 통속적이지요?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패전의 쓰라림은 젊은이들을 데카당스적 세계로 견인합니다. 도덕, 의미, 책임이 무너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일상적 욕망이었습니다. 젊은 대학생인 요시오카는 아주 구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자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게 그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미츠라는 여성을 만난 것도 그의 속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츠와 만나 자기 욕망을 채우고는 그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맙니다. 미츠는 남의 불행이나 슬픔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시오카의 독백처럼 미츠는 "타인이 저지른 죄마저 뒤집어쓰고, 일부러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버리는 바보 천치"(엔도 슈사쿠, <내가 버린 여자>, 이평춘 역, 어문학사, p.176)입니다. 미츠는 그 이후에 공장을 떠나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술집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락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타자를 배려하는 미츠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미츠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구원의 여인상으로 제시하는 소냐를 연상시킵니다. 소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몸을 팔며 살지만 그의 영혼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나중에 미츠는 한센병 진단을 받고 수용시설에 들어갑니다. 깊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여러 환자들을 보면서 자기의 운명을 조용히 수용합니다. 나중에 그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용시설을 떠나지만 남겨진 이들의 그 쓸쓸한 눈빛을 떨쳐버릴 수 없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환자들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애덕으로 돌보며 사는 데 그 행위에는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미츠는 자기 품에서 숨을 거둔 6살 짜리 아이를 바라보며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미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러냐는 수녀의 질문에 미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런 거 이젠 어찌됐건 상관없어요. 단지 저로서는 하느님이 왜 소 같은 어린애마저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어린애를 괴롭혀서는 안 되잖아요.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앞의 책, p.295) 수녀는 요시오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고통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미츠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미츠는 그 고통의 연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앞의 책, p.296)라고 말합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통해 종교의 외피를 두르지 않은 거룩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타자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다가서는 이들은 타자들의 고통을 무감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지 않으면서 거룩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마음 시린 사람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려는 미츠의 모습이 참 감동적입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이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한 분이 지나가는 말처럼 툭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이 책을 청년들과 함께 읽으면 반드시 이런 질문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서 미츠는 구원을 받았나요?'"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금방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미츠가 명시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았는 데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아, 참고로 미츠라는 이름을 뒤집으면 '츠미'가 되는 데 츠미는 '죄罪'의 일본어 발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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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6 04-13 10:04)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미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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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16 04-13 10:04)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특정한 단어가 들어가면 올라가질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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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6 04-17 04:04)
미츠가 함께 있다면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해주고 싶네요.아이의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분이 아파하시는 고통이아닐까 생각해 보라고.. 모든 일을 하나님 맘대로 하시지 않으시는, 은총을 닫고 함께 견디셔야하는 하나님의 괴로움도 있지않을까 싶어요. 어리석은 생각이라면 주여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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