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0 2017년 06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님이 오신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을 보며 푸른 하늘을 그리워 했는데, 벌써 장마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후 변화로 인해 한반도에 장마가 찾아오지 않을 때가 멀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니, 궂은 날을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미의 계절이 지나면서 산수국, 까치수영, 능소화가 앞다투어 피어났습니다. 때가 되면 시절을 탓하지 않고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이 참 고맙습니다. 변덕스러운 인간사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그 꽃들 앞에 멈춰 서보면 어떨까요? 지난 겨울과 봄, 이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치적 담론들이 잦아든 자리를 일상적 삶에 대한 이야기가 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입니다. '저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hor'과 '믿을 만한', '진짜의'라는 뜻의 단어 'authentic'이라는 단어는 그 뿌리가 같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삶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르는군요.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인간의 삶이 달라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마다 자기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살아내야 합니다. 자유와 운명 사이에 걸린 외줄 위에서 우리는 위태롭게 살아갑니다. 운명을 거슬러 자유 쪽으로 담대하게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고, 운명의 당기는 힘에 자기를 맡긴 채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오리지날'로 태어나 '카피'로 살아가는 게 타락이라고 말하더군요.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요?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의 글쓰기를 ‘일래버레이션elaboration'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정교화’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단어는 ‘밖을 향해’라는 뜻의 ‘e-’와 ‘활동한다, 만들어낸다’는 뜻의 ‘labor’가 결합된 것이라고 하네요. 오에 겐자부로는 그것을 ‘노작勞作’이라고 옮깁니다. 그는 글을 다듬고 또 다듬어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그게 작가로서의 책임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에는 글뿐만 아니라 인격도 일래버레이션을 통해 최고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돌아보며 그것을 공들여 가다듬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새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에의 글은 반성조차 없이 허둥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요구받은 일을 해내기에 급급하다보면 존재에 대한 물음에 충실할 수가 없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존재 망각의 시대'라 했습니다. 현실 세계에 깊이 빠진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것은 퇴락(頹落, Verfallenheit)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수렁에 빠진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여 이런 물음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이런 퇴락의 현실을 일깨우고,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신앙의 보람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빌3:8)고 말합니다. 요한과 바울은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장자莊子의 양생주 편에는  ‘제지현해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호경 신부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매인 해방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일체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겁니다. 자유는 버릴 것을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옹골차게 붙들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꼭 붙들고, 붙잡아야 할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 전도된 우리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버려야 할 것은 아깝고, 붙잡아야 할 것은 모호하게 느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리는 세월만 보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새로움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시는 '님이 오신단다'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님은 물론 다시 오마 약속했던 주님일 것입니다. 시의 화자는 오시는 님을 위해 길을 닦아 예비하자고 말합니다. 나를 보러 오시는 님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높은 것 낮추고

우므러진 것 돋우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지저분한 것을 다 치워

님이 바로 오시도록 하자"


어딘지 익숙하지요?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사야를 인용하여 외쳤던 말씀의 변용입니다. 이건 물론 님이 오실 길을 잘 닦아야 한다는 말이지만, '길'이 삶의 은유임을 생각해 볼 때 공의가 사라진 우리의 현실을 치유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중뿔나게 남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은 좀 낮추고, 기가 죽어 지내는 이들은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이리저리 뒤틀린 길, 불의와 거짓이 득세하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 오실 길을 닦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기다림의 내용을 선취해야 합니다. 좋은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고, 분주하다는 핑계로,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우리는 깊은 영혼의 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다보니 어느새 태만과 나태가 몸에 배고 말았습니다. 의욕과 활기를 잃어버린 채 너무나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순간 나른하고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화들짝 깨어보니 님이 오실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당혹스럽습니다. 


"님을 기다린다면서

그저 잤고나

이것저것을 온 방 안

허투루 늘어놓아

그저 앉으실 곳도 없이 했구나"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실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사회도, 나라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온갖 허섭쓰레기들이 잔뜩 널려 있습니다. 인종주의, 전쟁과 테러, 수치와 혐오, 냉소와 탐욕, 증오와 악다구니가 넘칩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정의는 강자의 편익에 불과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편에 서서 아벨을 희생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강화를 위한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불의에 저항하지도 않았고, 유린당하는 약자들 편에 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시간은 다가오는데, 마음은 급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님과 만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허둥지둥 더러운 것들을 치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바쁠 뿐, 성과는 미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꼴이 문제라는 자각이 참 중요합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

물을 뿌리자

묵고묵고 앉고앉고

이 먼지를 다 어찌하노?

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덕지덕지 바닥에 앉은 때는 아무리 닦으려 해도 잘 닦아지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습니다. 쫓기듯 사느라 삶의 공간이 그렇게 더러워진 줄도 몰랐습니다. 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모래라도 깔아 주님을 모셔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발을 옮겨 놓을 곳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마당에서 고샅으로 이어지는 길바닥에는 비에 패였는지 돌부리가 드러났고, 다리는 무너진 상태 그대로입니다. '너'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이렇게 황폐하게 변해버린 겁니다. 불통의 세상에 오래 살다보니 그게 운명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고 살았습니다. 이래서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해야 할 일은 태산입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정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애가 탑니다. 그런데 그 때 님이 가까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세수조차 하지 못했고, 손도 더럽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할 사이도 없는데 큰일입니다. 그때 오시는 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주님은 허둥거리는 우리 마음을 오히려 위로하십니다. 아직 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님을 맞고자 하는 그 마음을 기쁨으로 받아주십니다. 손님으로 오시는 주님이 바닥에 엎드려 더러운 우리 방을 닦아주십니다. 천장의 거미줄도 다 걷어내십니다. 닦다가 닳아질 우리 마음까지 닦아주십니다. 면목 없지만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은혜의 열림입니다.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찬송가 274장 1절).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조차 은혜입니다. 더러운 내면을 닦아내고, 죄로 얼룩진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원의는 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도로 받으셔서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십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에 다만 감복할 뿐입니다.


"쓸자 닦자 하던 마음

그것조차 맘뿐이고

님이 손수 쓰시고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쓸자 닦자 하던 마음/그것조차 맘뿐'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마음을 먹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조차 품지 않는 마음이라면 주님도 어쩌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의 결과만 생각한다면 그런 허무주의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잠시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불의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패배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사라 칭함을 받는 파커 파머는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은 '실적'을 쌓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겠다는 헌신의 마음뿐입니다(파커 J.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홍병룡 옮김, 아바서원, 2013년 11월 25일, p.140 참조).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내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다만 그분의 은총 앞에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밝히자면서 못 밝힌 방

저절로 밝아지고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

나중에 맑아졌으니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저절로'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진리를 뜻하는 '아레테이아'는 '레테' 즉 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개시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밝히고, 맑히려는 노력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새가 부화되는 데는 알 속에서 자란 생명이 밖으로 나오려는 치열한 노력과 아울러 바깥에서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알을 쪼아주는 어미 새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이 절묘한 어울림 속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겸손한 체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 고백입니다. 시인은 이제 '님 곁에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세상 일은 다 잊고 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힘만 의지하고 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지레 절망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님 곁에'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 칠흑같은 어둠 너머로부터 비쳐드는 빛 말입니다. 그 빛을 본 사람은 더 이상 게으르고 몽롱한 잠 속에 빠지지 않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 사상가 에드문드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움직여야 하고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 서늘한 바람처럼 다가와 우리를 깨우시는 주님과 동행하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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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7 06-15 11:06)
감동적인 글입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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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릴리(17 06-17 06:06)
아 목사님~~감사,,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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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7 06-18 05:06)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 주님께서 큰 은총으로 내 안에 이루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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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희(17 06-19 10:06)
아주 오래전 부터 목사님의 책을 빠짐없이 읽고, 매주 말씀 설교도 꼼꼼히 찾아서 듣고있습니다~
때론 그 집중이 균형을 잃을까 분별도 하고 그러네요~~^
참 좋은 스승을 만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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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카(17 06-20 01:0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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