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3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

새해가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복잡한 세상살이에 지쳐 갈 즈음이면 찾아와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고마운 손님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새해가 되면 두 가지 인사말을 나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되게 사세요." 복 많이 받으라는 축원의 말로도 충분하지만, 그 말이 너무 닳아빠진 것 같아 복되게 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것입니다. 너무 강박적인 것이 아닐까 싶어 저어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은 인사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되게 사세요."

어렸을 때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작심삼일일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뭔가 목표를 세워본다는 건 그만큼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단 뜻일 겁니다. 달력도 바꿔달고, 일기장도 마련했습니다. 그 텅 빈 백지에 적힐 다양한 서사를 떠올리며 흐뭇해하기도 했습니다. 수첩에 적어놓았던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정리하면서 그들과 맺어왔던 관계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부박했던 만남을 반성하고, 이러저런 일들로 멀어진 인연 때문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을 새롭게 하기 위한 그런 의식조차 치르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삶의 멀미가 심해졌기 때문일까요? 기껏 마음에 품는 다짐이라는 게 '건강을 위해 하루에 몇 걸음 이상 걸어보자'라든지, '작고 사소한 일도 기뻐하고 경축하며 살자'는 정도입니다. 생이 많이 시시해졌습니다. 아직 푸른 날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은 조금 다르겠지요? 사는 게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기획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해가 바뀐다고 하여 시간이 새로워지진 않습니다. 관습적인 사고에 붙박인 채 새로운 시간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갑각류처럼 껍질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의 기억이 많을수록 우리는 속 마음은 꽁꽁 숨기고, 가면으로만 사람들을 만나려 합니다. 그럴수록 세상은 우리 존재를 받아주는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낯설고 무정한 공간으로 인식됩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99% 사람들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단어는 '불안정하다, 불확실하다'는 뜻의 프리케어리어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로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 처한 비정규직 혹은 파견직 노동자·실업자·노숙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편인한 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위태로운 삶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삶이 위태로울수록 우리 마음의 여백은 사라지고, 타자를 향한 연민과 존중의 마음은 줄어듭니다. 거부당할까봐 조바심치고, 잊혀질까 두려워합니다. 새해에도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겁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요구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빌3:20). 우리가 진정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면 땅의 현실에 따라 부평초처럼 나부끼지 않아야 합니다. 

티쉬리 월(9월 중순에서 10월 초에 해당) 초하루에 시작되는 유대인의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날이 오면 제사장들은 쇼파(나팔)를 불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현존 앞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운 냇가나 강으로 나가 옛 삶의 흔적들을 강물에 띄워보내는 상징적 의례를 행하면서,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좋은 해가 되길 바란다"고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뿔 나팔 소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품으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20세기의 유대 철학자인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가 상기시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깨어나라, 너 잠자여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변순복, <변순복과 함께 하는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 탈무드 에듀 아카데미, 2015년 4월 30일, p.221에서 재인용)

시간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관에 조율되었던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기준음에 맞춰 조율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세상 혹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젊은이들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염려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꼰대짓 한다는 비난을 무릅쓰면서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결국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종말의 빛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영원의 빛 아래서 시간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도정일 선생님은 지금 우리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망령을 '공포의 문화'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용어는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안의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장 전체주의가 가져오는 거대한 공포가 있는데, 그건 경쟁의 무차별적 일상화를 특징으로 하는 정글사회 또는 밀림사회의 도래라는 공포입니다.…'공포의 문화'란 삶의 안정적 전망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공황심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입니다. 일종의 거세공포지요. 낙오자, 열패자, 노숙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거세에 해당합니다. 거세공포는 불안의 가장 강력한 기원입니다."(장회익, 최장집, 도정일, 김우창, <전환의 모색│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의 나무, 2008년 9월 1일, p.215-216)

사회적 거세에 대한 불안이 전방위적으로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기획해도 불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합니다. 유동하는 공포가 마치 안개처럼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핥고 있습니다. 그런 불안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대용물 혹은 해독제를 찾습니다. 유사 전능함을 제공해주는 돈을 좇기도 하고, 쾌락으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별 생각없이 소비할 수 있는 방송용 오락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공포의 문화의 짝패는 선망의 문화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대중문화나 스포츠 스타들입니다. 그러나 선망은 언제나 지연된 욕망일 뿐입니다. 선망의 마음이 클수록 현실은 잿빛으로 물듭니다.

조금 가혹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삶은 늘 신명이 나서 사는 게 아닙니다. 뜻을 알아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나지 않아도,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도 살아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살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듣지 못했기에 우리는 세상을 바장이며 걸어갑니다. 조금 개인적인 고백을 해볼까요? 삶의 의미 물음에 몰두하던 젊은 시절, 허무주의적 감정이 나를 확고히 사로잡곤 했습니다. 가장 뜨겁게 삶을 기획하던 시기에 무시로 찾아들던 허무의식 때문에 참 힘들었습니다. 허무의식은 삶의 다채로운 빛깔을 무채색으로 물들입니다. 뭘 해보아도 신이 나지 않았습니다. 연애도, 공부도, 투쟁도, 뜨거운 논쟁도 다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의 요구'는 무위의 인력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게서 허무의식은 한 번도 극복된 적이 없습니다. 조금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내가 부당한 권위에 머리 숙이거나, 허망한 열정 혹은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어쩌면 그 허무의식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야기가 곁길로 갔네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이제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식의 이분법적 고뇌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기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얼마 전 <전라도닷컴>(2017년 9월호)이라는 잡지에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페이지 가득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었습니다. 종일 토란대 껍질을 벗기고 가르는 일을 하느라 지문 사이사이, 손톱 밑까지 초록 물이 든 김오순(77, 임실 덕치면 천담리 천담마을) 할매의 손이었습니다. 사진에 붙인 글에서 기자(남인희, 남신희)는 할머니의 말을 인용합니다. "토란 한 관(4킬로)이 말리문 한 근이여. 일할 때는 산더미여도 말려노문 째까여." 상황이 떠오르시지요? 몇 접의 마늘을 까거나, 고구마순 몇 단의 껍질을 벗겨본 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할머니의 노동은 약빠른 이들이 보기에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식들이 그 광경을 본다면 제발 그만 두시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게 당신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할머니의 그런 노동의 의미를 기가 막히게 요약했습니다. "산더미 앞에 굴하지 않고, '째까'에도 허망해 하지 않는다." 왜? 그럴 줄 알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부들은 씨를 뿌린 후에 싹이 나오지 않으면 그 위에 움씨를 뿌립니다. 가뭄이 들어 싹이 타들어가면 농부들의 가슴도 타들어갑니다. 수확이 보잘것없으면 한숨이 하늘에 닿기도 하지만, 이듬해 봄이면 어김없이 다시 논과 밭을 갑니다. 그게 그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도 한 번의 붓질에로 시작되었고, 만리장성도 노동자들이 돌 하나를 놓는 데서부터 시작되었겠지요. 미국의 시카고 미술원에 있는 조르쥐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207.6*308cm)는 수없이 많은 점을 찍어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빛의 마술에 놀라기보다는 화가가 견뎌야 했던 인고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런 작품들 앞에 설 때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움찔거리며 낙담하는 나의 버릇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절망도 견디고, 허망함도 견디고, 권태도 견디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함도 견디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레 두려워 할 것도 없고,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부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나 지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가렴주구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갈릴리 어부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런 부당한 세월이 끝나고, 행복의 시간이 오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날'은 위로부터 도둑처럼 임하는 날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육사, '광야')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리라는 생각을 품어보지 못했을 사람들을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부들, 냉소주의자들, 과격한 사람들, 세리가 예수의 꿈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일체의 경계선이 무너진 세상의 꿈이 그들을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끌었습니다. 작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편집자인 김기돈 목사님은 중국의 내몽골 사막에서 나무를 심는 인위쩐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거칠고 모진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초록의 땅으로 바꾸려는 사람이었습니다."그분은 생명의 흔적도 없는 황량한 죽음의 땅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답니다. 쉼 없이 날마다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나갔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한 사람이 어떻게 사막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사막은 어느새 옥수수가 자라고, 수박이 넝쿨을 뻗고, 미루나무 숲에 새들이 날아오고, 동물이 깃드는 생명의 땅이 됐습니다. 날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을 줘야 하는 나무만 2만 그루가 넘는다고 합니다. 힘겹게 가녀린 잎을 내민 나무에 그녀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옆으로 새나가면 아깝고 안타까웠답니다."(<희망, 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 고진하 외 34인 지음, 꽃자리, 2016년 10월 14일, p.51-52)

모래가 서걱이는 땅을 숲으로 바꾸려는 한 사람의 작은 꿈이 이룬 위대한 정경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올해는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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