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6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권력 중독에서 벗어나기

권력(權力)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지배하여 강제로 복종시키는 힘”1)이다. ‘지배’와 ‘강제‘가 권력의 필연적인 속성이라는 말이다. 권력은 지배하는 이와 지배당하는 이를 발생시킨다. 설사 합법적인 권력관계라 해도 흔쾌하지만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권력의 유혹은 강렬하다. 나의 뜻을 누군가에게 강제하고, 그가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일 때 전능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니체는 권력 의지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라 했다. 누구의 강제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리에 선다는 것처럼 매혹적인 일이 또 있을까? 동물의 세계에도 엄연한 서열이 있다. 페킹 오더(pecking order)가 그것이다. 이 말은 조류 세계에서 개체간의 우열관계로 정해지는 순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종내 싸움에서 결정되는 개체간의 순위를 이르는 말로 일반화 되었다.

이소노미아
지배는 약자들에게 그림자를 남긴다. 그림자는 지배력의 행사 과정에서 부과된 강제를 숙주로 한다. 르상티망(resentment), 즉 원한감정은 분노, 증오, 질투, 선망 등의 그림자가 켜켜이 쌓이면서 형성된다. 과도한 지배의 욕망과 거기서 파생된 원한감정은 불화를 낳게 마련이고, 불화는 항구적인 갈등의 뿌리가 된다. 지배하는 이와 지배당하는 이가 갈리지 않는 사회 체제는 가능한 것일까? 그리스의 예를 살펴보자. 씨족적·부족적인 전통이 강한 그리스의 폴리스에 화폐제도가 도입되면서 불평등과 계급대립이 심화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채무노예로 전락했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에서는 화폐경제나 교역을 폐지하고 경제적 평등을 철저화했다. 그것은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었다. 한편 아테네에서는 시장경제와 자유를 유지한 채로 다수인 빈곤계층이 국가권력을 통해 소수의 부자로 하여금 부의 재분배를 하도록 강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아테네의 데모크라시이다.”2)
그러나 이런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지속되기 어려웠다.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예들이나 그곳에 몸을 기탁해온 외국인들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 부를 축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그런 불평등한 사회체제에서 벗어나 이오니아로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유로운 교역이 보장되고 계급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 이것을 일러 이소노미아(isonomia) 곧 무지배(no rule) 체제라 부른다. 하지만 이소노미아도 지속되기 어려웠다.

애굽의 전제정치에서 벗어난 출애굽 공동체 역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지 않는 평등공동체를 꿈꿨다. 출애굽 이후 사사 시대까지, 즉 왕정이 등장하기 전까지 히브리인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종의 이소노미아를 지향했다. 이스라엘의 지파 동맹이 바로 그것이다. 권력의 폐해를 누구보다 철저히 경험했던 이들이기에 그 꿈은 가슴 벅찬 소망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꿈은 현실 속에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지파 동맹만으로는 중앙집권적인 사회로 돌입한 주변 나라들의 힘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평등공동체의 꿈은 현실의 곤고함 앞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백성들은 최후의 사사인 사무엘에게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청했다. 사무엘은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결국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왕정 제도를 허락했지만, 그 제도 속에 감춰진 문제점들 또한 지적하셨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3)

권력의 속성인 ‘지배’와 ‘강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소상히 밝히신 것이다. 사울과의 세력 다툼 끝에 승리를 거둔 다윗은 성경에서 아름다운 인간형의 표본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음악가인 동시에 시인이었으며, 불의 앞에서는 분노할 줄 아는 용감한 전사였고, 뛰어난 정무 감각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점점 변질되어가는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우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줄 아는 사람이었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 일어난 일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산성에 머물고 있던 그는 고향인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을 마시고 싶었다. 베들레헴에는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다윗의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뚫고나가 우물물을 길어왔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4).

전락의 서막
이런 다윗의 인생에 오점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밧세바를 범한 일이다. 봄이 되어 왕들이 출전하는 때에 일어난 일이다. 팔레스타인의 봄은 건기가 시작되는 때이다. 고대 국가들은 자기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곤 했다. 영토를 넓히는 것보다는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쟁은 일상이었다. 다윗의 범죄 이야기는 암몬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왕권이 공고해지면서 다윗은 더 이상 전쟁터에 나가지 않는다. 전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요압은 암몬을 압박하고 최후의 거점인 랍바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사무엘서 기자는 그런 상황을 간략히 요약한 후에 왕궁에 남아있던 다윗의 모습을 조명한다.

저녁 무렵 다윗은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닌다. 먼 곳에서 부하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의 급박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문득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서 뜻밖의 장면이 펼쳐진다.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한다. 그가 돌아와 말한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질문 형식의 이 대답은 다윗이 ‘엘리암‘과 ‘우리아’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엘리암과 우리아는 사무엘상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37인 용사들 명단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부하의 그 대답도 다윗의 욕망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일사천리다. 왕은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더불어 동침한 후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자를 돌려보낸다. 성경은 이 대목을 전할 때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여자’라는 보통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인격성을 박탈당한 채 욕망 충족의 대상물로 변한 존재를 암시하는 것일까?

이런 다윗의 모습은 낯설다. 이제까지 알던 그 다윗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견결(堅決)하기 이를 데 없던 다윗은 사라지고 파렴치한 사람만 남았다. 하지만 인정하자. 이것도 다윗의 일부이다. 그의 속에 잠재되어 있던 죄의 가능성이 적절한 때를 만나 현실화된 것일 뿐이다. 창세기 6장 2절은 권력자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지를 신화적 언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이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는 구절과 만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람둥이 신들의 모습이 연상되지만, 사실 이 대목은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일들이 투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선원들이 갓 잡은 고래를 피쿼트호의 뱃전에 붙들어 매자 상어들이 몰려와 고래 기름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흑인 요리사인 플리스는 상어들에게 지혜의 말을 늘어놓는다. 탐욕을 부리는 게 본능인 줄은 알지만 그 본성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몸 안의 상어를 잘 다스리면 너희도 천사가 될 수 있어. 천사라는 건 잘 길들여진 상어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 대목을 두고 너새니얼 필브릭은 이것이 “인간에 대한 멜빌의 최종적인 생각”5)이라고 말한다. 우리 속에 있는 상어 곧 본능을 다스림을 통해 인간은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말일 것이다.

방조죄
무릇 모든 범죄에는 조력자가 있게 마련이다. 전령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왕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하다. 채홍사(採紅使)는 조선조 연산군 때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된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사대부나 상민, 기혼자든 미혼자든 가리지 않고 예쁜 여자들을 잡아다 연산군에게 바쳤다. 가정이 해체되는 일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오직 권력자의 비위나 맞췄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를 통해 우리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6)이라는 말을 배웠다. 나치의 절멸 정책의 하수인으로 일했던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후에 만든 개념이다. 전범인 아이히만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별다른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료적 성실함만 드러낼 뿐이었다. 아렌트는 세상에는 특별히 악한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했던 것이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은 무사유(thoughtlessness)라고 말했다. 무사유는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지만, 아렌트는 이 말을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혹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7)의 결여로 이해했다. 왕의 그릇된 열정에 대한 측근들의 방조 혹은 동조를 통해 범죄적 행위가 완수되었다.

욕정을 채운 다윗은 벌써 그 사건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인(여기서도 밧세바의 이름은 발설되지 않는다)은 임신했고, 곧 바로 사람을 보내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린다. 다윗은 즉시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일렀고, 요압은 즉시 우리아를 다윗에게 보냈다. 다윗은 전선에서 돌아온 우리아에게 요압과 군인들의 안부와 싸움터의 형편을 묻는다. 그리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말한다.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우리아가 왕궁에서 벗어나자 왕의 음식물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부하들과 함께 잤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우리아에게 왜 그리 했느냐고 묻자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8). 다윗은 그 다음날도 우리아를 불러 대취하게 만들고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강직한 우리아는 여전히 부하들과 함께 머물렀다. 범죄를 은폐하려는 왕의 음모와 충실한 군인 우리아가 대비됨으로 권력자의 비루함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다.

마음이 급해진 다윗은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우리아 편에 보냈다. 편지는 우리아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요압은 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즉시 우리아를 랍바 성의 용장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보냈고, 마침내 우리아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평생의 측근인 요압조차 왕의 범죄를 은폐하는 일에 일조를 했던 것이다. 오도된 권력은 이처럼 다른 이들까지 망가뜨린다.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
권력은 한계 혹은 제한을 철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권력은 절대 권력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특권에 익숙해지고, 말의 권능을 과신하는 순간 권력은 반드시 타락하게 마련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 사무엘하 11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보내다’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 단어야말로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윗은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냈고(1절), 목욕하는 여인이 누군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령을 보냈고(3), 그 여자를 데려오도록 전령을 보냈다(4). 전선에 있던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지시했고(6), 우리아가 집으로 들어가도록 보냈고(8),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냈다(14). 그의 권력 행사는 제한이 없다.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저항 없이 수행한다. 우리아는 죽었다. 다윗의 범죄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윗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12장은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1)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것은 다윗의 권력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암시한다. 욕망, 범죄, 범죄의 은폐기도, 살인 교사, 전투를 가장한 처형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잊고 있는 분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신 하나님 말이다. 과도한 욕망은 우리에게서 하늘을 앗아간다. 누군가를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하늘은 저만치 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그들의 행위를 잊지 않는다.

다윗의 이런 몰락은 많은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어쩌자고 성서 기자는 믿음의 용장인 다윗의 몰락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했단 말인가? 이미 있는 기록을 지울 수 없기에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려 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이 이야기를 다윗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읽으려 했고, 다른 교부들은 밧세바의 목욕을 예수 세례의 예표로 해석함으로 구원사적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이 사건은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은 벌거벗은 밧세바의 육감적인 나신을 보여준다. 다윗은 등장하지 않거나, 아주 작게 그려진다. 그런 구도는 다윗의 범죄가 밧세바의 도발로부터 야기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성폭력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성폭력을 경험했던 여성들이 수치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 사실을 폭로할 때, 그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꽃뱀이라는 혐의를 씌우거나, 왜 그때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꾸짖기도 한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성폭행을 경험한 여성들이 그 순간 저항력이 마비되는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폭력적 상황이 주는 강력한 스트레스, 혹은 긴장과 공포로 인해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그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성폭행의 피해자들은 저항하기도 어렵고, 또 저항하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의 불균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연예계나 종교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이들은 성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범죄로 인식하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은 그들에게 아예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지배당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권력자 본인의 심성도 파괴하게 마련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사무엘하 11장을 소재로 하여 여러 점의 소묘를 남겼다. 렘브란트는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다윗의 초조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전선에서 온 전령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다윗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있다. 왕 앞에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있는 전령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다. 우리아가 전사했다는 보고서일 것이다. 그의 팔에는 죽은 이의 군복과 무기가 걸려 있다. 그것은 우리아의 죽음을 입증하는 증거인 동시에 다윗의 범죄를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그 전령의 바로 뒤에 나단을 배치하고 있다. 다윗에 비해 왜소한 체격이지만 그는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의 당당함이다. 렘브란트가 이들 소묘를 남긴 때는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 막바지였다고 한다. 젊은 날의 허영심이 다 스러진 후, 세월과 더불어 자기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있던 모든 군더더기가 덜어진 후,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었던 것이 아닐까?

직언에 귀 기울이라
다윗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단과 같은 선지자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단은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환관적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체제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권력과 맞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왕의 호감을 사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길을 택했다. 체코의 문인이자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현실과 불화하고 현실에 대항한다. 진리에 잇닿아 있는 자는 어찌할 수 없는 저항자로 산다".9)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마치 한담을 늘어놓듯 어떤 성읍에 살고 있던 두 사람 이야기를 꺼낸다.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아주 많은 거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겨우 암양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한 마리에 불과했기에 그는 양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 집의 아이들에게 그 양은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인색했던 부자는 자기 짐승을 잡아 대접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강탈해다가 나그네를 대접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10)

'마땅히'라는 말이 눈에 띈다.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 당연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다윗은 자기가 지배하는 땅에서 그런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그 이야기가 다윗을 빗댄 이야기인 줄 다 알지만 다윗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성찰의 회로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우리 눈은 바깥은 잘 살피지만 자기 속은 잘 살피지 못한다. 나단은 다윗을 향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엄하게 말한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나단은 좋은 말을 고르기 위해 우물쭈물 하지 않는다. 비수처럼 예리하게 다윗의 허위의식을 찌른다.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섰다.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김찬호 박사는 직언의 목적은 단순히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변화시키거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의도로 하는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방어막을 치기”에 급급한다. 누가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나?

“현재의 자기를 미완의 존재로 여기면서 끊임없이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직언이 감사한 선물이 된다. 반면에 취약함을 감추려고만 하면 불손한 참견이나 성가신 지적으로 여겨진다. 권력욕이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또는 자존감이 너무 낮으면 그렇게 반응한다. 과도한 자기애 그리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 관건이다.”11)

나단은 다윗의 죄목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여호와를 업신여긴 죄. 범죄에는 형벌이 따르는 법, 나단은 다윗이 받을 벌도 열거한다. 그의 집안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자각하고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의 위대함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권력이 자기 근원을 잃고 지배의 욕망으로 변질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온다. 예수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을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12) 하고 가르치셨다. 어쩌면 진정한 영성이란 특권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싹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사리처럼 남을 자꾸 들이받기보다는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는 나단의 비수같은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삶은 조금 맑아질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인격의 등가물로 여기는 속물들이 넘치는 세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꿰뚫린 당당한 이들이 일어나야 한다.

주)
1) 동아새국어사전(1989년 판)
2) 가라타니 고진, <철학의 기원>,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년 4월 1일, p.41
3) 삼상8:11-17
4) 삼하23:17
5) 너새니얼 필브릭, <사악한 책, 모비 딕>,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2017년 8월 1일, p.84
6)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년 11월 10일, p.349
7) 한나 아렌트, 앞의 책, p.104
8) 삼하11:11
9) 바츨라프 하벨, <불가능의 예술>, 이택광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6년 6월 1일, p.296; 박영신 교수의 '해제' 중에서. 
10) 삼하12:5-6
11) 김찬호, <눌변>, 문학과지성사, 2016년 6월 20일, p.80
12) 눅22:25-26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