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로댕의 ‘대성당’ 2019년 10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로댕의 ‘대성당’

미술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아는 조각가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누가 떠오를까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아닐까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친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은 왠지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여서일까요? 미술사가들은 로댕의 위대함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마련된 고전적 아름다움의 문법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균형, 우아함, 이성, 절도(節度)를 통해 그리스 조각가들은 아름다움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댕은 이상화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비참함, 운명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추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타고난 조각가였지만 빈곤했던 가정 형편 때문에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랑제콜에 3번이나 낙방했고, 스무 살 무렵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건축물 장식가의 제자로 들어가서 장식적인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75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그의 삶은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속에서 그는 그림자에 주목했고, 그 그림자가 불안한 영혼의 상태, 실현될 수 없는 열망을 담고 있음을 알아챘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장식적인 작품 제작을 거절하고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 ‘청동시대’가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조각가로서의 그의 입지가 단단해집니다. 

그는 1880년에 장식미술관을 건립하려던 프랑스 정부로부터 정문 조각을 위탁받습니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지옥의 문’ 제작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나중에 장식미술관 건립 계획이 변경되면서 결국 ‘지옥의 문’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 작품에 등장하는 200여 명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문 앞에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라고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댕은 세기말적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던 당시의 유럽을 우울하게 바라본 것 같습니다. 보들레르의 영향 때문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1884년에는 제작한 ‘칼레의 시민’은 로댕이 영웅적 이상보다 두려움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이들의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백년 전쟁 중에 벌어진 한 사건을 형상화한 것인데, 칼레시는 칼레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6명의 영웅들의 기상을 표현해주기를 바랐지만, 로댕은 밧줄을 목에 건 그들을 고뇌에 가득 찬 인물들로, 죽음의 공포 앞에 서 있는 이들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가 1891년에 제작한 ‘발자크상‘입니다. 그는 발자크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그의 투쟁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봉두난발인 머리카락, 움푹 패인 눈은 현실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발자크라는 인물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살펴보려는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대성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딕식 건축물을 떠올릴 것입니다. 고딕식 건물은 마치 지상의 인력을 거부하면서 위로 위로 올라가 마침내 하나의 중심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딕식 건물이 스콜라 철학의 건축적 재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로댕이 1908년에 제작한 ‘대성당’(브론즈, 65×30×30)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뭇 다른 형태입니다. '대성당'은 뜻밖에도 마주 세워진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두 손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 손은 한 사람이 기도하듯 모은 두 손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내민 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손이 모두 오른손이니 말입니다. 로댕이 원래 이 작품을 만든 것은 분수의 장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활모양의 두 손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도록 계획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장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결국 독립적인 작품이 되면서 ‘대성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두 개의 오른손이 빚어낸 공간이 참 아늑해 보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게 또 있을까요? 노동하는 손, 기도하는 손, 어루만지는 손, 마주잡아 친근함을 드러내는 손, 손사래를 쳐 거부감을 드러내는 손, 손은 이처럼 많은 말을 합니다. 로댕은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서는 손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누군가를 향해 내민 손은 더 이상 자신의 출신지인 육체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몸짓이라는 것이지요.
미국의 소설가인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대성당‘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아내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던 한 남편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아내의 손님 로버트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손님을 남겨두고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남편은 매우 곤혹스러워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허튼소리를 주고받다가도 이내 할 말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담배를 나눠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도 시들해질 무렵, 무료함과 민망함을 달래보려고 텔레비전 채널을 서핑했지만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었습니다. 어느 채널에서 세계 각국에 있는 대성당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나'는 로버트에게 묻습니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로버트는 수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탁으로 '나'는 대성당의 형태에 대해 설명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로버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종이와 펜을 가져와 함께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말합니다. 그는 펜을 쥐고 그림을 그려나가는 '나'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은 채 대성당 그림을 느꼈습니다. 벽체, 첨탑, 아치 모양의 창문, 버팀도리, 큰 문. 그림을 그려나가는 동안 둘은 어떤 충만함을 맛봅니다. 
이 작품은 '본다'는 사실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나'의 손 위에 '너'의 손이 포개질 때 비로소 대성당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 거룩함은 두 존재의 만남을 통해 발생한다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강은교 선생의 ‘당신의 손’은 어루만짐 혹은 마주잡음, 다가섬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누군가를 나와 다르다 하여 밀어낼 때, 장벽을 세워 소외시킬 때 거룩은 소멸되는 법입니다. 로댕의 ‘대성당‘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닌지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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