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성스러움을 품고 있는 속됨 2020년 12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성스러움을 품고 있는 속됨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이 있는 정물>(65.7cm × 78.5cm)

네덜란드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는 당대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작품도 몇 점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동생 테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흐라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빈센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는 지역민들에게 존경받는 개혁파 교회 목사였습니다. 그는 수시로 병자들을 심방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곤 했다고 합니다. 빈센트는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아버지를 깊이 존경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 그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바다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도 목회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으려고 벨기에의 보리나쥬라는 곳에서 석탄 광부들을 돌보는 전도사로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광부들이 젊은 전도사를 외면했지만 그들의 아픔과 절망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광부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은 민중들의 삶과 깊이 밀착되어 살려는 빈센트에게 목회자의 자질과 품격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에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낮은 곳에 머물면서 생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그의 꿈은 그렇게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빈센트에게 그리스도는 “우리 죄악을 알고 계시는 위대한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에 실패한 후 잠시 에텐의 교구에서 일하던 부모의 집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는 아버지 테오도루스와 상당한 갈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밥벌이 할 기회도 찾지 않고 빈곤한 삶을 택하겠다고 하는 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빈센트도 제도 교회에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아버지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절망감 속에서 그에게 빛이 되어 준 것은 그림입니다. 그에게 그림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임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게 1880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낮은 자리에서 복음적 가치를 살아내려 했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서 그는 영원의 옷자락을 포착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림은 그에게 실패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일이었지만 세상의 평가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동료 화가인 마우베와 대화 중에 모욕적인 말을 듣습니다.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한 그는 화가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전기 작가인 어빙 스톤은 그 말에 빈센트가 이렇게 응답했다고 썼습니다.

“그게 화가임을 뜻하는 건가요, 그림을 판다는 게? 나는 화가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면서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했었죠. 나는 그건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찾아냈다’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는 화가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지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일 따름이죠.”(어빙 스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 최승자 옮김, 까치, 1993, p.211)

물론 이건 빈센트의 말이라기보다는 어빙 스톤이 그의 입에 넣어준 말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빈센트가 삶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를 잘 포착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성경이 있는 정물화>는 1885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5년 쯤 지난 무렵입니다. 빈센트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회한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때까지 화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빈센트는 고루한 과거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에게 자연주의 소설가들의 소설을 소개했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핵심적 메시지가 그 속에 형상화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변화하는 현실에 눈을 뜨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빈센트는 에밀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들의 글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누구의 책이 아버지에게 건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테오도루스는 소설이 범죄를 옹호하거나 부도덕을 부추기는 것으로 여겼기에 아들의 권고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의 접점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극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 1885년 3월 26일, 교인 집을 심방하고 돌아온 테오도루스가 집 현관 앞에 쓰러져 회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 같아 빈센트는 깊은 번민에 빠집니다. <성경이 있는 정물화>는 10월에 그린 작품입니다. 칙칙한 갈색 탁자보가 덮여있는 탁자가 보입니다. 그 위에는 펼쳐진 커다란 성경책 한 권과 자그마한 소설책 한 권, 그리고 촛불이 꺼진 촛대가 놓여 있습니다. 탁자 위의 공간 배경은 짙은 검정색입니다. 

두꺼운 표지의 성경과 소박한 장정의 소설이 대조적입니다. 그 소설은 수많은 손길이 스쳐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서리는 닳아 있고, 겉표지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설이 에밀 졸라의 <생활의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빈센트가 ‘La Joie de vivre’라는 제목을 표지에 적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소설이 아버지의 세계와 아들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두툼하여 묵직해 보이는 성경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장중함과 무거움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작고 가뿐해 보이는 소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보여줍니다. 펼쳐진 성경은 어둡고 칙칙한 회색과 갈색 톤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소설의 표지는 밝은 오렌지색입니다. 빈센트는 소설을 반사회적 혹은 반교권적 가치를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메시지가 소설 속에서 빛나게 형상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밀 졸라의 <생활의 기쁨>의 주동인물인 폴린은 자기 포기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전형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의 평안함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도 폴린은 우울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맑은 웃음으로 주변을 밝게 만들었습니다. 폴린의 그 밝음이 책 표지의 밝은 오렌지색으로 형상화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빈센트는 성경책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세계를 부정하려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심히 보면 성경의 펼쳐진 페이지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녹색과 노란색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메시지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펼쳐진 성경은 이사야53장입니다. 성경의 오른쪽 위에서 우리는 ‘Isaie‘라는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이사야라는 뜻입니다. 네덜란드 사람인 그가 프랑스어로 표기한 것은 판매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아래에 라틴어 숫자 표기인 ‘LIII’ 자가 보입니다. ‘53’이라는 숫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빈센트는 아버지 테오도루스의 삶이 고난 받는 종의 삶과 연결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은 고난의 종과 ‘슬픔의 사람’ 그리스도는 빈센트의 마음속에서 하나였을 겁니다.

이제 꺼진 촛불에 대해 말할 차례입니다. 꺼진 촛불은 절망 혹은 시대적 우울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vanitas)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회한을 그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바다는 푸르게 유지되듯이 역사는 그런 변화 속에 있습니다. 전통과 현대, 무거움과 가벼움, 성스러움과 속됨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공존할 때 역사는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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