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무르익음과 설익음 사이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무르익음과 설익음 사이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느닷없는 자동차 경적 소리 때문이다. 서행 운전을 하는 앞 차 운전자에게 빨리 가라는 경고이거나, 보행자에게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신호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불쾌하다. 보행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성마른 운전자를 흘겨보는 것뿐이지만, 그래본들 이미 평형을 잃어버린 마음은 수선스럽기만 하다. 사람들은 왜 이리 서두르는 것일까? 경쟁에 내몰리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기 때문일까? 재독 학자인 한병철은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 신경과민, 막연한 두려움 등이 오늘의 삶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시간을 쪼개 쓰고, 그 쪼개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그릇된 확신이 우리를 시간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시간, 모두에게 일의적으로 파악되는 시간, 가속의 시간은 매우 폭력적이다. 시간의 갈피에 숨겨져 있는 삶의 비의와 직면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느림이 추방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수없이 많은 정보를 다루지만, 정보는 지속되지도 않거니와 향기도 없다. 우리는 인류사의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해졌지만 그저 윤똑똑이일 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는다. 세상이 정해준 루트를 따라 질주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숨이 가쁘다.

가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어먹던 때를 기억 속에 소환한다. 솥에 쌀을 안치고 물을 조정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지만, 불을 지피는 것은 아이들도 하던 일이다. 불땀 좋은 솔잎이 자작자작 타들어가는 모습에 넋을 잃고 있다가, “밥 다 끓었다. 불을 쫌 꺼내라. 그래야 뜸이 들지.” 하는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을 때도 있었다. 불길이 너무 세면 밥이 타고, 불길이 아주 약하면 밥이 설익는다. 무르익음과 설익음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잘 가늠하는 것이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설익은 말과 감정을 거르지 않고 드러내 보이는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은 자기 앞에 있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생각과 지향이 다른 이들에게 불온의 찌지를 붙이고, 혐오를 선동하는 이들이 참 많다. 회의와 성찰을 거쳐 참된 인식에 이르기보다 집단의 의지에 동화되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누군가를 배척하기 위해 발화되는 종교적 언어는 길거리의 경적소리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준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면서 침묵의 세계에 들어갔던 비트겐슈타인의 홀가분한 퇴각이 차라리 진리에 대한 엄정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포장하여 말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종교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안으로 거두어들임이 없다면 인생은 여물지 못하는 법이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우리의 부박함을 아파하며 더 깊은 진리의 바다로 침잠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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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혜(19 05-29 12:05)
적절하게 조화함이 정말 어려운 듯합니다 ㅡ
어떤때엔 소통이 안된다고 평가받아 오해받음의 고통이 온통 본인의 몫이어야하며 ,
또 어떨때엔 그걸 풀어보고자 말없이 상대방이 느껴주길 바라며
무리속에서 본인의
존재감의 부재를 알면서도 있어야할 듯한 ㅡ
진리에 대한 엄정함이 주는 경건함 속에서 느껴지는 평온함을 누릴때 ,
그 부분들이 믿음의 견실함이 주는 걸까하는 의문도 때로는 듭니다 .
ㅡ 그래도 노력하며 나아가 봅니다 .
글과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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