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삶은 고달프지만 장엄하다 2020년 10월 31일
작성자 김기석
삶은 고단하지만 장엄하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사람들’

밀레는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입니다. 농촌생활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만종’이나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사람들’은 그 신산스러운 삶의 애환보다는 고즈넉한 목가적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일쑤 소환되곤 합니다. 밀레는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바르비종(Barbizon)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1820년 이후 많은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역사를 뜨겁게 달구었던 프랑스 혁명의 퇴행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생활에 지쳤던 화가들은 이곳에 모여 자연과 숲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웅들의 역사나 신화가 아닌 자연 속에서 그들은 위안을 찾았던 것입니다. 테오도르 루소, 장 바스티스 카미유 코로, 쿠르베 등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화가입니다. 그들이 그린 풍경화는 자연을 이상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얻어진 통찰을 그렸을 뿐입니다. 그들의 작품이 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에게 농촌 풍경은 그야말로 정서의 원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그림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화가로서의 그의 이력이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바르비종으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그의 일상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L.A 근교에 있는 게티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 ‘괭이를 든 사람’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후줄근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지친 듯 괭이에 두 손을 올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 대지를 딛고 있는 괭이와 그의 추레한 두 다리가 마치 ‘사람 인人‘ 자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살이의 어려움이 이미지화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헤벌어진 입과 표정이 그가 느끼는 피곤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일구어진 밭은 고된 노동의 시간을 일깨워주지만 그가 계속해서 직면해야 할 시간은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돌짝밭입니다. 엉겅퀴가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누가 일깨워주지 않아도 성경 구절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창3:17-18) 밀레가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신세 한탄이 터져나올 것 같은 광경입니다. 갈색 대지와 분홍빛 하늘이 서로 스며들어 곤고한 삶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저 멀리에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대지를 기름지게 하기 위해 풀들을 태우는 연기일 것입니다. 

삶은 이렇게도 고단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을 보면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장엄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척박한 대지를 일구며 살아가야 하는 일은 물론 힘들지만,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수용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검질긴 모습은 생명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감자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 손이 대지를 일구던 흙 묻은 손이라는 사실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해나 산불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시간을 들여 정성껏 가꾸어 온 삶의 터전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거나 거센 물살에 쓸려 사라졌을 때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잠시 절망과 탄식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 삶의 자리를 정돈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닦아야 할 것은 닦습니다. 다시 일어섬, 그것이 생명의 아름다움이고 장엄함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전 세계의 황량함을 표현하기 위해 성서 기자가 선택한 단어는 ‘혼돈’, ‘공허’, ‘어둠’, ‘깊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셨지만, 세상은 때로 혼돈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노아 홍수는 궁창을 통해 갈라놓았던 혼돈의 물이 다시 합쳐졌음을 보여줍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의 문들이 열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혼돈으로 돌아간 세상을 질서 있게 회복할 책임을 떠맡고 있습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그런 인간의 위대함을 힘차게 보여줍니다. 대지를 굳게 딛고 선 그의 동작은 역동적입니다. 적대적인 운명에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겠다는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여 그린 ‘씨 뿌리는 사람’(1888년)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과 저 멀리 물결을 이루는 밀밭을 배경으로 씨를 뿌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노란색과 보라색을 섞어 쓴 대지는 비교적 편안해 보입니다. 밀레의 그림보다 훨씬 낙관적인 분위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밀레의 그림에서 씨앗을 움켜쥔 농부의 손이 마치 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밀레의 삶이 곤고했음을 반증하는 것일 겁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83.5*111cm, 오르세 미술관)은 1857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40대의 왕성한 시기에 그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분위기는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을 대변합니다. 여인들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엎드려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수확한 것들을 무겁게 실은 마차가 보입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큰 마차입니다. 우측 상단 저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보입니다. 아마도 밭의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채 수확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옆에는 짚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까마득한 저 하늘 위로는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면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주인은 여인들입니다. 그런 배치는 여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두 여인을 구분해주는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의 색깔입니다. 파란색과 붉은색이 단조로운 풍경에 색채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그들이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여인의 왼손의 배치 또한 절묘합니다. 한 여인은 이삭을 든 왼손을 등 뒤로 올리고 있고, 다른 여인은 무릎께에 두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손은 투박합니다. 오른쪽에 선 여인은 이제 막 허리를 굽히려 하고 있습니다. 수확물을 담기 위해 엉덩이께에 질끈 동여맨 앞치마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낯빛이 어두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의 모습은 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홍빛 하늘은 어쩌면 곤고한 노동 속에 깃든 희망이 아닐까요?

이 그림을 대할 때 사람들은 즉각 룻을 떠올립니다. 자신을 나오미 곧 ‘기쁨’이 아니라 마라 곧 ‘괴로움’이라 불러달라고 했던 시어머니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낯선 땅으로 이주하고,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던 룻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거룩함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선 자리가 거룩함을 체현해야 할 자리입니다. 거룩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밀레는 바로 그런 삶의 장엄함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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