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묵화’ 같은 세상의 꿈 2021년 02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묵화’ 같은 세상의 꿈

생과 사의 경계선을 상정하고 살지만 삶은 언제나 그러한 인간의 가정을 배신하곤 한다. 느닷없이 닥쳐온 별리의 아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물어올 때면 그저 가슴만 먹먹해진다. 나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쓸쓸함, 분주하게 살고는 있지만 실상은 지향을 잃고 맴돌고 있다는 자각이 찾아올 때면 돌연 세상은 낯선 곳으로 변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파악하는 인간은, 부여받은 삶의 언저리를 맴돌며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바장인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 삶에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데, 홀로 무의미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뜩함을 호소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지성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해답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런 말이 지금 슬픔의 심연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끼는 이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속에 그늘을 품고 산다. 그늘은 실패와 절망, 슬픔과 허무가 갈마들며 우리 내면에 남긴 흔적이다. 그늘이 짙어 다른 이들까지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들이 있다. 음습한 곳에 자라는 버섯의 포자처럼 그들은 우울과 분노를 주변에 퍼뜨린다. 반면 그늘을 안으로 삭혀 으늑한 공간으로 빚어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내밀한 상처를 안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잠시 쉬어갈 공간을 내준다. 그곳에서는 울어도 되고, 한숨 자도 된다. 그늘이 아늑한 숲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삶이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권태는 삶의 깊은 곳을 응시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권태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속으로 침강할 뿐,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한사코 회피한다. 분초 단위로 분절된 시간을 살면서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일 것이다. 권태는 우리 삶이 깊이를 상실했음을, 그리고 타자와 연대하는 삶에서 멀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 권태로부터 우리를 건져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욕망의 터전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세상은 사람을 끝없이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을 지배하는 정서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영혼은 그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줄 수 있는 대상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프카의 성처럼 다가설수록 멀어진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가치는 고립에 대항하는 연대의 용기이다. 연대라 하여 비장할 것까지는 없다. 눈물 흘리는 이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것도 연대이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 일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넌지시 일깨우는 것도 연대이다. 김종삼 시인의 ‘묵화‘는 그러한 연대의 아름다움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나갔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연대는 흐름이다. 막혔던 것들이 툭 터질 때 느끼는 해방감이다. 우리 사회 곳곳이 막혀 있다. 막힌 곳에서 울혈이 생기고, 그 울혈이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협한다. 막힌 곳을 뚫어야 할 정치, 종교, 언론, 사법은 오히려 그 장벽을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사납고 독한 말들이 난무한다. 푸접없는 세상에서 삶은 점점 무거워진다. 시인이 그려 보여주는 ‘묵화’ 같은 세상의 꿈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꿈조차 버릴 수는 없다. 예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온갖 장벽들이 철폐되는 세상의 꿈을 인류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성과 속,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내국인과 외국인, 부자와 빈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가르는 담을 허물기 위해 그는 온 몸을 불살랐다. 장벽을 세우면서 그를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담장 저편으로 내몰려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은결든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방황하는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는 주려는 마음을 품을 때,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던 무거움이 스러지지 않을까? 바야흐로 입춘 절기이다. 봄볕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2021년 2월 6일,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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