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이마에 재를 바르고 2021년 02월 17일
작성자 김기석
이마에 재를 바르고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마다 기독교인들이 되뇌는 말씀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와 기름을 섞어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의례를 행하는 교회도 있다. 재를 이마에 바름으로 부끄러웠던 옛 삶을 청산하는 동시에 삶의 지향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세상을 떠나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시카고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고갱의 그림 제목이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생이고, 인생에서 불안을 빼면 흙이라던가? 배꼽이 탄생의 흔적인 것처럼 불안은 ‘없음‘으로부터 창조된 인간 속에 남겨진 무의 흔적이다.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이다. 그 숙명을 안고 살면서도 지향을 잃지 않을 때 삶은 의젓해진다. 미국의 신경과 전문의이면서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자기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며 고마움의 감정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다고 고백한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을 받았다는 것,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조금쯤 돌려주었다는 것,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는 것, 그 전부가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은 특권이자 모험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하며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는 것도 인생이고, 지향을 분명히 하고 올곧게 걷는 지사적 실존도 인생이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각자 내적 이끌림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살 수 없는 것은 삶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속에 스멀스멀 자리잡는다. 자기의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하여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곧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하여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고 말한다.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나름의 확신 때문이겠지만 그들은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종교인들의 언어가 특히 그러하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하다.

사순절은 일종의 순례의 시간이다.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자아의 죽음인 동시에 더 큰 세계를 향해 열린 통로이다. 그 통로의 이름은 사랑이다. 이마에 재를 바른 이들은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든든하게 붙잡아야 한다. 온기가 담기지 않는 말을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고,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남겨둘 줄만 알아도 삶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2021/02/17,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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