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추상적인 사랑을 넘어 2021년 09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추상적인 사랑을 넘어

온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랑은 대개 관념 속에 존재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보면서 애달파 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는 가슴 아파한다. 때로는 하나님께 왜 이 무정한 세상을 그냥 버려두시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아픔에 눈을 돌리며 똑같은 탄식을 반복한다. 세상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인터넷 공간에만 머물고 있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우리가 산뜻하게 유지하고 싶은 일상의 공간에 그들이 틈입할 때이다. 그 때마다 우리는 경계심을 품고 대하거나, 마음의 담을 쌓아 그를 밀어내려고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 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더 많다.

세상의 아픔을 차마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지기도 하면서도 고통 받는 이웃들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언뜻 드러나는 하늘을 본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무정하고 사나운 세상을 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팔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당위와 곤경에 처한 이들과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 자아 사이에서 바장인다. 조금씩이라도 당위의 방향으로 몸을 틀 때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건만 대개는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양심을 괴롭힐 때 우리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고통을 개별화시키거나,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힌 이들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변방에 머무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많은 표징을 행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몰리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지도자들은 기존 질서의 토대를 흔들고 있는 예수를 그대로 두면 모두가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을 약탈할 것이라고 서로 말한다. 민족 전체의 안위가 걸려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실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의 해체였다.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민족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셈법은 간단하다.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교묘한 논리는 악마적이다. 희생 되어야 할 개인 가운데서 자기들은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늘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들려준다.  막강한 적들이 도시를 점령한 후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적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성경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위급할 때면 우리는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우리는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용기이다. 추상적인 사랑 담론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 하나에게 성심을 다할 때 문득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21/09/01 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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