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큰 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2022년 02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큰 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

시적시적 겨울을 통과했다. 느리지만 분명한 폭력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거움이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깎아내리기 위해 발화되는 말들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그 말들이 공론의 장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려 해도 그 말들은 집요하게 귓전을 파고든다. 그 말들로 인해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고 창조적이어야 할 시간은 눅진눅진하게 변했다.

입춘 무렵부터 공원을 걸으며 사방을 두루 살피는 것이 일종의 의례가 되었다. 무거워진 일상을 잠시나마 뒤로 하고 다른 시간 속으로 돌입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다. 살짝 물이 올라 연록빛을 띠는 버드나무를 보며 ‘오오’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남녘에 벌써 꽃이 지천으로 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산수유나무를 살피고 있지만 아직 노란 꽃망울을 터트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볕뉘를 받아 몸을 일으키는 식물들을 보며 대견하다고 칭찬해준다.

세상이 소란하다. 쇠고기, 주술과 무속, 욕설, 본부장, 선제 공격, 대장동, 루머. 우리 시대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징후적 단어들이다. 징후는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미구에 닥쳐올 일들을 예고한다. 징후 읽기는 그렇기에 중요하다. 징후 혹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지도자들은 징후를 잘 읽어야 한다. 다른 이들이 포착하기 어려운 징후를 읽고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잘 가늠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세태를 꿰뚫어보는 혜안과 세계관과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러나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는 그런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대중들의 욕망에 기생하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파괴적 열정이 아니라 창조적 열정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붙들 수는 없는 것일까? 큰 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욕망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들은 누군가의 발을 찌르게 마련이다.

성경은 세계가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정의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사법적 정의‘를 일컫는 말이다. 재판관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의는 힘이 있는 사람들을 편들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불법을 묵인하거나 두남두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하여 있는 죄를 없다고 하지 않는다. 없는 죄를 만들어 벌을 주지도 않는다. ‘세상이 다 그렇지!‘ 하면서 톡탁치지 않는다. 사법적 정의가 바로 설 때 사람들은 공권력을 신뢰한다.

공의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쩨다카는 ‘회복적 정의‘를 일컫는 말로 자선 혹은 구제라는 뜻을 내포한다. 어떤 사회든 사람들의 공동생활에서 발생한 잉여를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부유해지고 또 어떤 이는 가난에 빠진다. 성경은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함으로써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자들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옳은 삶이다. 하지만 공의는 개인의 자선 행위에만 기댈 게 아니라 사회 제도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정의와 공의는 일종의 사회적 자본이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풍부하게 구현될 때 사람들은 높은 도덕성을 보이고, 강한 귀속의 감정을 느낀다. 정의와 공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스스로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사회학자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책에서 한국인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고 사는 삶의 문법이 있다고 말한다. 가족주의와 연고주의도 그 중의 일부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가족 밖에 없다는 사고는 시민의식의 부재를 초래한다. 사적 이익을 넘어서 공공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공적인 지위에 있는 이들이 가족의 호칭으로 서로를 호명하는 것도 일종의 유사 가족 만들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병폐는 연고주의로 인해 발생한다.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연줄이 없는 사람들은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연줄에 연결되어야 특권을 나누는 일에 끼어들 수 있다.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는 바로 이 연고주의를 숙주로 하여 자란다. 공정한 세상의 꿈은 늘 이 장벽 앞에서 스러지곤 했다. 그러나 꿈은 죽지 않는다.

선거는 시민들이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자기들이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하는 일이다. 선거는 주류 세계에서 밀려난 이들도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는 공동체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공론장을 독점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조정하거나 오염시키려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 2021/02/12,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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