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조각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놓고 2022년 04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조각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놓고

“우리의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탐욕에도 불구하고 우리한테는 무엇인가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 삶의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고 생각하고 공경하고 놀라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몰아간다. 종교를 탄생시킨 것은, 지성의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과 그 경험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07-108)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벌써 사순절 다섯째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봄날, 어떻게들 지내시는지요? 교우들 가운데 꽤 많은 분들이 코로나 확진되어 고생을 하셨거나 하고 계십니다. 다행히 중증에 시달리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기 후유증이 나타날 수도 있다니 정말 조심스럽게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 교회 화단에 있는 매실나무와 산수유는 꽃이 볼품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저도 제풀에 지쳤는지 그저 꽃 몇 송이만 매단 채 봄을 맞는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열매도 해거리를 한다지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지레 포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작약, 비비추, 수국, 백합, 옥매화, 제비꽃 새싹이 돋아나고 있고, 화살나무에도 여린 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살피꽃밭도 제법 볼만한 풍경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우리와 동행했던 안정숙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 이 교회에 왔던 1981년 권사님의 이름은 거의 매주일 강대상에서 언급 되었습니다. 거의 매 주일 새 교우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계실 뿐 도통 말씀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권사님이 운영하던 마을 한복판의 미용실은 사람들이 모이는 동네 사랑방과 같았습니다. 길을 가던 이들도 편하게 들어와 봉지 커피를 타서 마시기도 하고, 수런수런 이야기도 나누곤 했던 것이지요. 권사님의 그 순한 표정과 수다스럽지 않은 성품이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교인 가운데도 권사님의 인도로 나오게 된 분들이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의 수고를 그치고 쉬라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떠나셨으니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수 있기를 빌 뿐입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코로나 시대라 병원 심방도 할 수 없다보니 전화기를 통해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어려운 시간을 견딜 힘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 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현실이 아닙니다. 그래도 반갑지 않은 손님인 병이 찾아왔다면 잘 대접하여 돌려보내야 합니다. 너무 염려해도 문제고, 너무 무시해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병은 제 실력을 한껏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가족 곁에서 병 간호를 하는 분들은 자기 속에서 발현되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재확인하기도 합니다. 질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렇게 든든하게 이어주는 끈이 될 때도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출근과 동시에 2층 예배당으로 올라갑니다. 아직 햇빛이 직접적으로 비쳐들지 않는 그 예배당에 앉아 홀로 기도하고 묵상을 하다 보면, 햇빛이 서서히 창으로 스며들며 예배당이 조금씩 밝아집니다. 그 고요한 시간 저는 42년 된 예배실 공간에 스며있을 교우들의 기도소리와 찬송소리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분들의 마음이 되짚어지기도 합니다. 나무 벽이나 강대상, 회중석과 이어지는 나무 계단, 몰딩 등 여기저기 긁힌 자국을 바라보며 그 상처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없는 상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득 눈을 들어보면 스테인드글라스에 형상화된 예수님이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크 샤갈이 취리히에 있는 프라우뮌스터 예배당을 위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나 파리 노틀담성당의 장미창에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우리 교회 전면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좋아합니다. 각각의 유리조각들은 저마다 다른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배 부근에 내려앉고 있는 비둘기와 길, 진리, 생명이라는 글씨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시에서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던 자기 경험을 노래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자기 발치에 떨어진 것을 보며 그는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러다가 얼핏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을 알 것 같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알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지만 생략한 그 말을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조각난 마음은 자칫하면 남을 찌르고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쉽습니다. 모든 깨진 것은 모서리가 날카로우니까요. 그 깨지고 상한 마음들을 모아 주님께 바치면 주님은 자비의 빛으로 우리를 감싸주실 것이고, 그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올리고 있는 아침 묵상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하루에 한 장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어느새 레위기를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큰 맘 먹고 성경 통독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복잡한 제사법이 지금의 우리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 읽기는 재미있는 부분이나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읽으면 안 됩니다. 꽤 많은 분들이 이 아침 묵상을 통해 영적 유익을 얻고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큰 격려가 됩니다. 목회실 식구들에게도 이 과정은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매주 토요일, 장영숙 전도사님이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의 지혜의 말씀을 해설한 이덕주 교수의 책 <깨달음은 더디 온다>를 읽어드리려 합니다. 경청하다보면 우리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갈 삶의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아름답게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교우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안쓰러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 소리 또한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우리는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나 주류 세력이 아니라 주변화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저 높은 보좌 위에 좌정하여 계신 것이 아니라, 짓밟힌 이들의 힘이 되어 주시기 위해 세상일에 개입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 1:3)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통해 입증되고, 사랑은 수고를 통해 드러나고, 소망은 인내를 통해 결실을 맺는 법입니다. 바로 이것이 앞에서 헤셸이 말했던 요구받음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 열매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맺히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확산세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교우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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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바다(22 04-08 02:04)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의 내가 더 좋은 사람이길…용기내어 봅니다.

영상예배를 매주 드리는데 항상 감사드립니다. 특히 영상예배 말미에 나오는 꼬까울새 덕분에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청파교회에게 참 많이 감사합니다.
감사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두모두 평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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