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그릇된 확신의 위험 2022년 05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그릇된 확신의 위험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그는 살라망카에서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사상가인 미구엘 데 우나무노를 만나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오늘날 영적인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우나무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런 저런 깃발을 들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는 모습이 절망스럽다면서, 그런 혼란의 원인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우나무노는 그들을 ‘데스페라도 Desperado’라고 부른다. 데스페라도는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기에 정신은 와해되고, 거친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명분이 어떠하든 전쟁은 우리가 서있는 삶의 토대를 사정없이 뒤흔들고 파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두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 작가 바오닌은 전쟁이란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단절과 무감각을 강요하는 비탄의 세계’라 말했다. 거리에 널린 주검과 잘린 팔과 다리, 흥건한 피와 파괴된 도시는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최초의 충격과 아픔과 분노는 조금씩 무디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진다. 잊혀진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많은 이들이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전쟁 중단을 위한 어떤 역할을 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난 3월 2일은 정교회의 ‘용서의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전례를 통해 키릴이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푸틴에게 전쟁 중지를 요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우크라이나가 지난 1000년에 걸쳐 형성된 러시아적 순수성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서구 세계에 가담하려 한 것이 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타락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응징은 정당하다고 말함으로 그는 이 파괴적인 전쟁에 신성한 전쟁이라는 의상을 입혔다.

예일대학교 교수인 티머시 스나이더는 푸틴은 정교회를 통해 러시아를 지배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공산주의와 정교회, 테러와 신을 화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권력의지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때 권력은 제동장치가 망가진 열차처럼 폭주하게 마련이다. 종교성을 전유한 정치 곧 영원의 정치학은 과거를 신화화한다. 영원의 정치학은 추구해야 할 미래적 가치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선악의 문제로 환원한다. 선은 장려해야 하지만 악은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징계를 위해 선택한 전쟁은 성전이 된다. 순수한 러시아가 늘 죄악된 서구에 저항해 왔다는 서사가 그 전쟁에 명분을 제공한다.

영원의 정치학은 종교 근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근본주의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진실만 있기에 다른 견해나 입장은 제거되어야 한다. 근본주의적 사고의 바탕에는 폭력이 있다. 가장 잘 믿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배타적이다. 그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본다. 옳음과 그름, 선과 악이 뚜렷하게 갈린다. 현실 세계의 복잡함과 모호함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영연방 최고 랍비였던 조너선 색스는 사랑 그 자체이신 신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자비하신 분의 이름으로 잔혹 행위를 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생명을 지으신 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말살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타락한 종교는 평화의 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종교적 확신에 근거해 행할 때보다 더 완전하고 즐겁게 악을 행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종교는 불과 같아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태우기도 한다.

현대세계에서 종교는 불필요한 잉여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참된 종교는 사람들을 더 큰 이야기 속으로 초대함으로 자기를 초월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불확실함과 함께 살아갈 용기를 부여한다. 사람들을 개별화시키는 세상에 맞서 연대의 기쁨을 누리게 해준다.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의 불꽃을 보게 만든다. 또한 권력과 결탁하지 않은 종교는 일종의 사회적 자본의 저장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고, 위기에 처한 이들의 설 자리가 되기 위해 몸을 낮추는 이들은 또 얼마나 숭고한가?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불의한 제도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의와 평화와 기쁨이야말로 종교의 참됨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2022/04/30 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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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혜(22 06-07 09:06)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그러나 무시할수없으면서 .인정하기엔 좀 그런 복잡.미묘한것들이 목사님의 글로 정리되어 집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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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옥(22 07-21 12:07)
목사님 컬럼을 읽고 있으면 진리의 숭고함에 희열을 느끼고 절로 숙연해집니다.
흐릿한 판단에서 벗어나 확고한 신념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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