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잃어버린 가을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잃어버린 가을

고즈넉한 저물녘,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들판을 어슬렁거리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눈길을 주던 낭만은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교교한 달빛을 받고 있는 초가지붕 위의 하얀 박을 보며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하고 노래하던 시절도 저물었다. 목회자가 된 이후 가을은 삶의 풍성함을 누리는 계절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깊이 전락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상실의 계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단마다 총회가 열리고 있다. 하늘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성찰하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예수의 길에서 벗어난 우리의 참상을 고백하고 통회하는 시간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단장을 뽑는 일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다반사이다. 소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정치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거룩에 흠집을 낸다. 어머니 교회는 이래저래 상처투성이이다. 심리학 용어 가운데 가용성 편향이란 게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노는 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속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나님의 뜻’, ‘은혜’, ‘기도’, ’거룩’이라는 단어를 전유해 타락시키고 있다. 

올해 각 교단의 총회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목회 세습을 둘러싼 논의가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지만, 어떤 교단은 다른 교단에 속한 목회자와 단체들에 대한 사상 점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이단’이라는 라벨을 붙여 그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 다소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단체들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조치도 취하고 있다. 이게 정말 그리스도가 원하는 일일까? 그런 판단과 정죄의 바탕에는 자기 옳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미성숙한 사고의 전형이다. 적어도 계몽된 이들이라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를 교정할 여지를 열어두게 마련이다. 그릇된 확신은 위험하다. 종교적 확신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온전한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흔들리며 걷는 순례자들일 뿐이다.

존 웨슬리는 ‘관용의 정신’이라는 설교에서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사람들의 일치를 방해하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라고 묻는다. 드러난 차이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는 있다. 그러나 “서로간의 차이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행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든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 하여 그를 함부로 상종하지 못할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인가? 예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면서도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는 이들을 책망하셨다.

내 생각과 다르다 하여 곤댓짓을 하며 동료들을 정죄하는 일을 그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자신을 더 철저히 낮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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