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8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허망한 열정 너머의 세계
  -세베대의 두 아들들

그 운명의 날
누구에게나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예기치 않게 찾아와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순간 말이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그런 경험을 이렇게 노래한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경험은 한 순간일 수 있지만, 그 경험이 몸과 마음에 새겨놓은 흔적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을 떠돌던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과 만난 순간 더 이상 이전의 살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떤 만남은 우리 삶의 지속성을 차단하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어머니와 아버지들, 세월호 유가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운명의 날은 그분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작가 장 아메리는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겪었던 참담한 경험을 인류 앞에 증언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겪었던 고문 경험은 그의 영혼에 찍힌 영원한 낙인이었다. 그는 고문을 “타자에 의한 내 자아의 경계 침해”1)라고 말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대 고독 속에서 고통에 울부짖으며 속절없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더 이상 정신이 아니라 육체일 뿐이다. 자기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를 절대자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장 아메리는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2)고 말한다. 그는 결국 그 수치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정적인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는 정반대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마치 바람처럼 그들에게 다가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픔에 공감했고,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혔다. 아브라함 조수아 혜셀은 예언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로잡혔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삶은 선택이라지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 우리 삶의 틀을 바꿀 때가 더 많다.

그 운명의 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갈릴리 호숫가에 배를 정박시킨 채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 조상 때부터 이어온 가업을 그들은 운명인양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헤롯 안티파스의 야심 때문에 갈릴리 어부들의 상황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었다. 배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고, 땀 흘려 잡아 올린 물고기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외화벌이에 혈안이 된 헤롯이 호숫가에 지어놓은 염장 공장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어부들 가운데는 이꼴 저꼴 보기 싫다며 배를 물속에 수장시키는 이도 있었다. 갈릴리는 절망의 심연이었다. 그때 예수가 찾아왔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부름에 응답하여 그들은 생업을 떠났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그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허구의 평화가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고 있던 때, 힘이 정의인양 인식되던 그 암울한 시대에 그들은 주류에 편입되기를 포기하고 비주류의 길로 들어섰다. 염세적인 비주류 혹은 은둔형 비주류가 아니라 세상을 토대로부터 바꾸려는 실천적 비주류의 길이었다. 예수가 그들 속에 심어준 하나님 나라의 꿈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이적들은 그들의 꿈이 헛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했다. 숨 죽인 채 로마의 통치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이들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세상이 목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는 스승을 넘어 메시아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분이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그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들은 살짝 흥분했다. 더 이상 자기들은 역사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는 사실, 혁명적인 변화의 전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일종의 흥분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제자들은 예수에게 자기들의 꿈을 투사했다.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고대했다. 그가 오면 역사의 부정성은 제거되고, 삶의 역전이 일어나리라 기대했다. 그러한 기대는 번번이 절망으로 변하곤 했다. 독립전쟁을 통해 외세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마카비 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와 타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메시아를 자칭하는 이들이 더러 나타나곤 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 깊은 환멸을 안겨줄 뿐이었다. 예수도 자칫 잘못하면 투사된 메시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희망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마케루스 산성에 갇힌 채 운명의 날을 기다리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으셨다. 다만 당신이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요한에게 전하라 이르실 뿐이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예수의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권력에 대한 세상의 관념은 거절한 셈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다. 빌립이 황제에게 헌정하기 위해 세운 도시, 선진적인 헬라와 로마 문화의 선전장이 된 그 도시, 로마의 신상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걷는 그 길만이 영원하다고 고백한 셈이다. 베드로는 그 길의 의미를 안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신앙고백은 불완전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겪게 될 수난의 현실을 예고하자 그는 당장 예수를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는 아직 고난의 자리가 없다. 예수와 여러 해 동행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에 대한 통념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월터 윙크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부정적인 메시아 희망을 간결하지만 강력하게 요약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권위적인 인물을 원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곤란한 상태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져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모든 것을 변화시켜주기를 원해서 자기들은 변화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지도자가 선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망을 투사해서 우상화시킬 사람을 원한다.
사람들은 우주적 젖가슴을 지니고 자신들을 돌보아줄 사람을 원한다.”3)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절망의 심연에 빠진 이들은 희망을 구성할 힘을 내기 어려운 법이다. 희망도 단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는 백성들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 등 세 부류로 나눈다.4) 늘 눈앞의 일에 매여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이들이 항민이다. 힘 있는 이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가진 것을 다 빼앗기면서도 속으로만 윗사람을 탓할 뿐 저항할 줄 모르는 이들이 원민이다. 그에 반해 천지간을 흘려보다가 시대적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들고 일어나 역사를 변혁시키려 하는 이들이 호민이다. 지배자들은 항민이나 원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호민들의 발흥을 경계할 뿐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의 하류층 사람들은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세울 힘이 없었다. 그래서 항민이나 원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사를 연구한 에케하르트 슈테게만과 볼프강 슈테게만 형제는 지배층에 속하지도 못하고,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축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위계층으로 분류한다.

“농촌에서는 농업 노동자나 소작인(georgos), 날품팔이(misthios), 품삯 노동자, 채무 때문에 종이 된 사람 노예가 있었고, 도시에서는 소규모 장사꾼과 사업 경영자가 있었다. 거지·창녀·목자·노상강도도 하위 계층에 속하는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하위층에서도 가장 밑바닥, 즉 최저생계수준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5)
      (아래의 표를 여기 그려주세요) 6)


이 단절적인 사회 계층을 뛰어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라미드처럼 조직화된 사회 구조의 윗단에 있는 이들은 아랫단 사람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그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거짓 종교는 사회적 위계를 일종의 숙명처럼 포장함으로 그런 불의한 구조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가진 자들의 입이 되어 그들이 주는 보상에 탐닉하는 순간 종교는 타락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권위
그런 현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세상을 전복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간을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예수께서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를 하셨건만 제자들은 스승의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생각에 골똘했기 때문이다. 수난의 길로 접어든 바로 그때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청한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 다른 열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다. 둘의 청탁은 제자들 속에 잠들어 있던 은밀한 욕망을 깨웠다. 감히 발설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 바라마지 않던 일이 아닌가? 마치 선수를 빼앗긴 것처럼 그들은 화를 낸다. 그들 속에 깃든 그림자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태는 이 사건을 전하면서 제자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시를 미리 제거했다. 청탁의 주체를 야고보와 요한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로 소개하고 있다(마20:20). 그리고 화를 내던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아예 생략했다. 어쨌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베대 아들들의 욕망으로 인해 공유된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던 제자단은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해 긴장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그게 그들의 영적 실상이었다. 하지만 증상이 나타나면 치료 방법도 있는 터. 예수는 마치 외과수술을 하듯 그들의 그릇된 사고를 도려낸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으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

가치관의 전복이다. 힘은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일 뿐이다. 지배하는 주체의 전복만으로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힘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 말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철저히 낮은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 지역의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거덜난 이들, 성전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이들의 아픔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있나? 우리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강자들의 호의에 의지하려 할 때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동원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많아질 때 그 전락은 가속화되게 마련이다. 예수의 사도직은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 (어디까지나 필요하고도 정당한) 권위를 걸핏하면 지배에 의하여 확보하려 한다는 것은, 교회 본연의 모습을 흐리게 하는 가장 큰 비극의 하나다. 실은 이렇게 할 때에 바로 교회의 권위 자체가 실추되고 복음이 막중하게 손상된다. 진정한 권위는 지배를 단념하고 무력해졌을 때라야 빛이 나는 법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권위다.”7)

복음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서가 아니다. 유력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 정신을 꼭 붙들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풍요를 지향하는 순간 예수 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이다. 십자가의 신학이 아닌 영광의 신학에 취할 때 복음의 능력은 사라진다. 1996년에 세상을 떠난 신학자 이정용은 “예수의 출생과 성육신 이야기는 신적 주변화의 이야기”8)라고 단언한다. 수태의 순간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온통 주변성의 증언으로 넘친다. 외양간, 말 구유, 갈릴리, 나사렛,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의 연대, 십자가…. 이정용은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은 유혹을 중심과 주변이라는 틀 속에서 읽어낸다.

“주변부 관점에서 보면 사탄은 중심 중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자기중심적 힘force이 의인화된 존재이다. 사람들은 이 힘 때문에 중심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부와 명예와 지배라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9)

첫 번째 순교자
부와 명예와 지배를 추구하는 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다. 주님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들의 마음 속에 깃든 그 허망한 열정을 보고 적잖이 실망하셨을 것이다. 아직도 그들은 진정한 제자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포기할 수도 없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할 수 있나이다 “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38-40)

우문현답이 아니라 현문우답이다. 그들은 여전히 권력이라는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예수의 말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할 수 있나이다’. 어리석은 장담이다. 시련의 시간이 찾아오기까지 그들은 자기가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사정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장담한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자 그는 더욱 확고한 어조로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2-35). 이 말이 베드로의 진심임은 분명하다. 그는 분명히 스승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인간의 굳은 의지와 생각은 예기치 않은 운명의 일격으로도 허망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무너짐 그것은 쓰라림을 동반한다. 무너짐을 통해 처절히 부서지는 이들도 있지만, 무너짐을 통해 더욱 단단하게 일어서는 이들도 있다. 똑같이 예수를 버렸지만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제자들은 되돌아서서 다시금 진리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야고보는 제자들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네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가야만 할 예수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칼릴 지브란은 그의 책 <사람의 아들>에서 야고보를 예수에 대한 첫 번째 증언자로 삼는다.

“보라, 땅이 푸른 옷을 입었구나. 그리고 시내들이 어떻게 은으로 그 옷 가에 선을 둘렀나를 보라. 참말 땅은 아름답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너희가 보는 저 모든 것보다 더한 한 나라가 있다. 나는 거기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만일 하고자 한다면, 그렇다, 너희가 정말 원하기만 한다면, 너희도 또한 거기 가서 나와 한가지로 다스릴 것이다. 내 얼굴도 너희 얼굴들도 탈을 쓰지 않을 것이고, 우리 손에 칼도 홀(笏)도 들지 않을 것이고, 우리 아래 있는 것들이 우리를 평안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10)

야고보는 그런 세계에 이른 것일까? 높은 자리가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해체된 세계, 힘으로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빼앗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적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의구심을 품고 바라보지 않는 세상 말이다. 요한 또한 자기 한계를 넘어 예수의 증언자로 한 생을 살았다.

더 이상 용 꿈을 꾸지 말라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세상을 떠돈다. 좌절한 욕망으로 인해 영혼이 뒤틀린 이들도 있고, 세상 질서에 순치되어 저항하기를 포기한 이들도 있다. 길들여진 젊음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 젊음의 특색은 불온함이라는 데 불온함을 거세당한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버렸다. 사실 누구나 용이 되기를 꿈꾸는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다. 용 꿈은 우리를 경쟁 속으로 밀어넣고, 경쟁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경계하게 만든다. 그때 타인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오늘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은 용 꿈이 아니다. 그릇된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살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예수가 보여준 새로운 문법에 따라 삶을 재조직해야 한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한다.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오라 나의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계를 찾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다.
배를 저어라, 줄지어 앉아서
소리치는 파도 이랑 만들며 가자. 나의 목표는
내가 죽을 때까지, 석양 저 너머로,
모든 서녘 별이 자맥질하는 저 너머로 항해하는 것.
(……)
한결같이 영웅적인 기백이, 시간과 운명으로
쇠약해지긴 했어도, 애쓰고, 추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버텨 낼 강한 의지력이 아직도 있다.”11) 


주)
1. 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안미현 옮김, 도서출판 길, 2012년 11월 20일, p.80
2. 장 아메리, 앞의 책, p.91
3. 월터 윙크, <참 사람>,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년 3월 15일, p.244)
4. http://blog.daum.net/newmountain/771
5.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김판임 옮김, 동연, 2009년 1월 15일, p.223
6.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앞의 책, p.227
7.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1991년 3월 30일, p.198
8. 이정용, <마지널리티>, 신재식 옮김, 포이에마, 2014년 12월 5일, p.127
9. 이정용, 앞의 책, p.136
10) 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함석헌 옮김, 한길사, 1987년 2월 10일, p.12
11) 앨프리드 테니슨, <테니슨 시선>, 윤명옥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4월 9일, p.49-50
목록편집삭제